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
며칠 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막북행정록」을 다시 읽고 있었다.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 중 마부 창대가 말에 밟혀 부상을 입는 장면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연암은 창대의 고통을 자세히 기록했고, 함께 가던 사신들의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낯선 청나라 제독이 보여준 따뜻한 배려를 글로 남겼다. 연암은 창대가 기적처럼 다시 일행에 합류하자, “얼마나 기특하고 다행인지 말로 다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불현듯 MBC 뉴스에서 보았던 이재명 대통령의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대통령은 흐릿했다. 초점은 그가 바라보는 이태원 참사 골목에 맞춰져 있었다. 대통령의 얼굴은 의도적으로 가려졌고, 시선 너머의 장소와 사람만이 선명했다. 흔히 정치인의 공식 사진에서 보는 인물 중심의 구도는 없었다. 대신 대통령이 바라본 국민의 고통, 기억해야 할 현장의 무게가 사진의 중심에 놓였다. 그 사진은 설명보다 강했고, 침묵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했다.
사진을 찍은 위성환 작가 역시, 대통령이 아닌 국민을 사진의 주인공으로 삼는 낯선 시선으로, 새로운 정치 기록의 문법을 열었다. 그 장면은 연암이 창대를 바라보던 시선과 겹쳐졌다.
연암은 시대를 앞선 실학자였지만,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의 문장이 향한 방향이었다. 그는 늘 권력의 시선에서 비켜서 있었다. 『예덕선생 전』에서는 분뇨를 푸는 노동자를 ‘선생’이라 부르며 삶의 귀함을 되새겼고, 『광문자전』에서는 구걸하는 거지 광문을 추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정직과 순박함의 상징으로 그려냈다. 당시 양반의 시선이 닿지 않았던 이들을 그는 글 속으로 불러들여 존재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존재는 흐릿했지만, 그가 보고자 했던 사람들은 선명했다.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권력의 시선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에 머무는 공감의 시선이었다. 권위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기억을 새기려는 순간이었다.
이는 과거 윤석열 정부의 사진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빈 모니터를 응시하거나, 김건희 여사 뒤에 흐릿하게 잡힌 윤 대통령의 사진은 ‘누가 중심인가’를 물음 없이 드러냈다. 심장병 환아를 안은 사진이 ‘빈곤 포르노’ 논란에 휩싸였던 이유도, 그 시선이 사람을 향하기보다 자기 연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든 문학이든 결국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다. 연암의 문장과 이재명의 사진은 시대를 달리하지만, 시선은 같았다. 그것은 자기 얼굴보다 타인의 고통을 먼저 마주하는 태도, 말보다 눈빛으로, 권위보다 자세로 말하는 윤리였다.
우리는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보여주는 것’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기록이란 단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행위다. 연암이 창대를 향해 느낀 죄책감과 감사, 제독의 사려 깊음을 경탄하며 남긴 글처럼, 사람을 향한 시선이 기록에 깃들 때, 그것은 시대를 넘어 감동이 된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가 무엇을 쓰든, 무엇을 찍든, 무엇을 기억하든,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나의 시선은 지금 누구를 향해 있는가?"
--------------------------------------------------------------------------------------
윤규열은 [열하일기] 소개글에 연암의 행동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윤규열의 글이다.
"어떤 이는 연암을 일컬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새로운 질서를 갈구하던 경계인이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양반 중심의 봉건적 사회 질서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던 진정한 경계인은 경화세족 연암의 하인 창대처럼 인간과 비인간적 노동 환경 속에서 살았던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막북행정록」에는 연암 일행이 백하를 건널 때 창대가 말굽에 맨발을 밟혀 심하게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연암은 고통스러워하면서 걷지도 못하는 창대를 적극적으로 돕기보다는, 창대 대신에 자기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 줄 사람이 없음을 더 걱정한다. 그러면서 창대에게는 조심조심 기어서라도 따라오라고 하면서 자신은 말을 타고 먼저 길을 떠난다.
조선의 부사와 서장관도 다친 창대를 보았지만, 안타까운 표정만 지어 보였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창대는 운 좋게 청나라 제독의 도움을 받아 그가 내준 말을 타고 일행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창대가 연암에게 제독이 자신이 타던 말을 내주었고 친히 음식까지 챙겨주었다고 말하자, 연암은 창대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외국의 일개 천한 하인 위해 세세하게 마음을 쓴 청나라 제독의 성실한 직무 태도를 들먹거리면서 대국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감탄한다."
박수밀은 [열하일기 첫걸음]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한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부 창대가 백하를 건너다가 말발굽에 밟혀 편자가 살 깊이 박히는 바람에 발이 퉁퉁 붓는 아찔한 사태가 일어난다. 연암은 말을 함께 타고 갈 수도 없고 또 다른 수레엔 짐이 잔뜩 실려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창대 혼자 뒤따라오게 했다. 굶주린 데다 추위에 벌벌 떨며 아픈 몸으로 냇물을 건널 창대를 걱정하는 연암의 마음이 글 여러 곳에서 보인다. 『막북행정록』에는 창대의 사연이 많다. 신분이 낮은 하인을 화제의 중심으로 다루고 하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양반의 작품을 다른 글에선 본 적이 없다.
창대는 어찌 되었을까? 열하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창대가 연암의 말 앞으로 와서 절을 했다. 연암은 이때의 마음을,“얼마나 기특하고 다행인지 말로 다할 수 없다”라고 표현했다. 사연인즉 창대가 뒤에 쳐져 고갯마루에서 통곡할 때조차 조선사신들은 태울 수레가 없어서 그냥 지나갔다. 그때 중국 제독이 그 광경을 보았다. 제독은 말에서 내려 창대를 위로하고 함께 지키고 앉았다가 지나가는 수레를 세내어 창대를 싣고 온 것이다. 제독은 손수 음식을 권해 창대를 먹이고, 자신이 타던 노새를 창대에게 주어 타고 쫓아오게 했다고 한다. 연암은 이 일에 대해 “남의 나라 일개 천한 하인을 위해서 마음 씀씀이를 이같이 빈틈없고 완전하게 한다”라고 적었다. 자국민은 도와주지 못했는데 낯선 이방인이 이토록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인간은 낯선 존재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리가 발동한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는 존재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준다고 하지 않던가. 낯선 존재는 모르는 존재일 뿐,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연암은 이방인 제독의 마음 씀씀이를 통해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에 대해 은근히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곽동건 MBC뉴스 기사문 원문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찾아간 날 대통령실이 공개한 사진입니다. 이 대통령의 옆모습은 뿌옇게 초점이 나가 있고, 그 시선이 향하는 참사 현장이 선명히 찍혔습니다.희생자를 기리며 묵념하는 이 대통령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선 아예 대통령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에서 대통령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은 미완성'이라고 적힌 추모 시설물이었습니다. 대통령 일정을 기록하는 대통령실 공식 사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다소 독특한 구도. 이 대통령이 접경지로 향하는 헬기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초점은 창밖을 향했고, 대통령실 구내식당 직원들을 만났을 때도 활짝 웃는 직원들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연천군청에서 보고를 받는 사진에서도 이 대통령은 뒤통수만 보이고, 마주 앉은 군청 관계자들이 파안대소하는 장면을 선택했습니다. 대통령이 방문한 현장의 특징과 만난 사람들의 의미 등을 담아내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통상적인 정치 사진의 문법을 깨는 파격이 더 진정성 있게 보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통령 전속사진사인 위성환 씨는 당초 유럽에서 탱고 사진을 주로 찍던 작가였는데, 지난해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그의 사진을 촬영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전 윤석열 정부에서는 임기 초반부터 대통령실 공식 사진이 여러 차례 큰 논란에 휩싸였던 것과 확실히 대조된다는 반응도 나옵니다. 2022년 나토 정상회의 참석으로 첫 순방에 나섰던 윤 전 대통령은 빈 모니터 화면이나 백지를 들여다보는 듯한 사진이 공개돼 지적을 받았습니다. 특히 김건희 여사 사진을 둘러싼 논란이 컸는데, 캄보디아에서 심장병 환아를 안은 사진에 '빈곤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이 나왔고 일부 행사에선 악수하는 김 여사 뒤의 윤 전 대통령 얼굴에 아예 초점이 나간 사진이 공개돼 '김건희실이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김 여사의 마포대교 현장 점검이나 순천만정원박람회 방문 사진 등에도 중요한 현장을 단지 본인의 모습을 부각하는 '배경'으로만 동원했다는 비판이 쏟아진 바 있습니다.
윤규열은 노동자의 아픔을 더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수밀은 그 당시 조선시대 신분질서가 공고한 상황을 고려하면 연암의 창대에 관한 생각도 진일보한 것이라 본다.
위성환 작가의 시선과 MBC곽동건 기자의 시선! 시선의 만남과 관점의 변화.
시선이 관점의 변화를 낳고, 관점의 변화가 태도를 낳으며, 태도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를 낳는다. 노동자, 서민, 민중이 주인 되는 시대가 국민주권시대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연암의 실용정책과 생명중심주의를 잘 이해하여 초심을 잃지 않는 대통령,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