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기택 판사, 문형배, 한동수, 우리법연구회]

-우리법연구회가 지향하는 헌법연구회, 인권

by 백승호

판사 한기택과 우리법연구회,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판사로서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법관 한기택이 남긴 글 가운데, 그의 둘째 딸 한동아 씨가 특히 마음에 담아둔 문장이다. 삶이 남긴 무게보다 더 깊이 남는 말의 무게. 한 판사의 신념은 그의 딸의 기억을 통해 세월을 건너 지금 여기 우리에게 다시 전해진다.


한기택 판사의 둘째 딸 한동아 씨는 아빠가 쓴 글 중에 기억나는 것을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더디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빠르고,
슬픈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길고,
기쁜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짧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저희에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빠, 사랑해요.


사람들은 그를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라고 불렀다. 그는 서울 영동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86년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지법 동부지원, 대전지법 강경지원, 서울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2002년부터는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의 이력보다 더 오래 기억될 것은, 그가 남긴 판결이었다.

법무부가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에 대해, 본국에 남겨둔 성인 자녀의 한국 초청을 제한한 처분에 대해 그는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에 위배된다”라고 판단했다.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육군 이등병에 대해 그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고위공직자가 재산 등록을 회피할 경우, 직계 가족이 등록을 거부했을 때는 이유와 이름을 공개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도 그였다.

그의 판결은 법이 누구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리고 2005년 7월,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그의 빈자리를 지켜보던 동료들은 『판사 한기택』이라는 책을 펴냈다. 대표 집필진인 김종훈 판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 기억을 맡기는 것이 두려웠고,
그를 가족과 우리만의 기억 속에 가두는 것도 안타까웠다.”

한기택 판사3.JPG

한기택 판사의 정신은 문형배 판사를 통해 세상에 더 깊이 알려졌다. 한기택의 5주기 추도식에 다녀온 문형배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일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람들이 기억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시선집중.JPG

그리고 2025년 6월 23일, 문형배 헌법재판관과 한동수 전 대검 감찰관이 MBC <시선집중>에 함께 출연하여, 다시 한번 ‘한기택’ 판사를 기억한다.


한동수 감찰관은 말한다.

“한기택, 그분은 두 가지 말씀을 늘 기억에 남기셨어요.
하나는, 판사가 무엇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진정한 재판이 시작된다는 것.
또 하나는, 목숨 걸고 재판을 해야 한다는 것.
그 말씀 안에는 헌법의 가치와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공직자는 국민 전체에 봉사하는 사람이지, 자기 출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조화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던 그분의 정신,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문형배 재판관 역시 한기택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분은 우리법연구회 회장 시절, 저희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근가 되려 하지 마라. 너희는 재판 잘하는 데 집중해라.
딴 데 신경 쓰지 마라.’
언론도, 권력도, 판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판사들이 약한 부분이 딱 하나 있죠. 인사입니다.
승진이라는 욕망을 내려놔야, 진짜 판사의 삶이 시작된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 말씀을 지금까지도 제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기억은 결국 ‘우리법연구회’로 이어진다.
우리법연구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판사들이 모여, 더 나은 재판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민하고 나눈 모임이었다. 그것은 권력의 장막 뒤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판사로서의 본령을 찾으려는 지성의 공동체였다.


문형배 재판관은 이 연구회 활동이 본인이 헌법재판관으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우리법연구회는 헌법적 가치를 현실에서 실천하려는 진지한 법관들의 학문 공동체였다.

2004년, 우리법연구회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무죄’라는 입장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당시에는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2018년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우리법연구회가 시대를 읽고, 법의 해석을 통해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판사정신’을 강조했다.
한기택 판사가 보여준 것처럼, 판사는 권력이나 언론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기록과 법률 앞에 겸허해야 한다. 우리법연구회는 바로 그런 정신을 공유하고 키워낸 공간이었다.


이처럼 한기택 판사가 남긴 ‘헌법과 인권’의 정신은 우리법연구회를 통해 판사들의 삶과 재판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자발적인 연구와 토론, 그리고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법적 상상력이 우리법연구회의 지향점이다.


우리가 ‘판사 한기택’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생애를 회고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말한 삶의 자세는 지금도 많은 판사들의 가슴에 남아 법정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가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그는 ‘되었다’.
진짜 판사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연암과 이재명, 위성환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