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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과 필요의 균형을 찾아서]

허서진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를 읽고

by 백승호

살아가면서 누구나 ‘본질과 필요’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삶의 본질과 삶의 필요가 일치하면 삶이 쉬울 텐데,

어긋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본질에 부합하는가?

나는 핵심을 통찰하며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가?

학생들에게 본질을 가르치고 있는가?

독자에게 본질을 전달하고 있는가?


본질을 전달해야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늘 고민하는 것은

이것이 나와 상대방에게 필요한가입니다.

필요한 교육인가?

필요한 정보인가?

살아가면서 의식하지 않지만 늘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존재 존재증명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존재란 무엇일까?

나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인가?

나는 집에서 필요한 존재인가?

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나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존재로서 인정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정한 교실은 살아있다2.JPG


허서진,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는 책은 ‘국어교사’라는 동료의식 때문에 좋아했고,

교육현장과 국어교사의 고민을 섬세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있어서 자주 봅니다.


126~127쪽

국어 교과의 '본질' 같은 허상보다는 고득점을 위한 '효율성'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게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도. 다른 말에는 흔들리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말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수능이 너무나 중요한 시험이고 입시는 고등학교 생활의 종착지였다. 나도 그 시험을 거쳐 교사가 되었고 아이들도 그 시험을 무사히 거쳐 무언가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본질을 고민한답시고, 아이들의 필요를 무시해도 되는 걸까. 본질과 필요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다.


283쪽

아이들에게는 삶을 다루는 수업만큼이나 좋은 점수가 필요하다. 교육으로 유리 천장을 뚫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교육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특히 현재의 삶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큼 극적인 전환점은 없다. 나 역시 교육이라는 전환점을 통과하여 결핍으로 점철되었던 세월에서 벗어났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결국 좋은 점수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의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본질과 필요’ 고민하며 그 사이를 와가며 균형을 찾으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본질에만 힘을 쓰면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고

내가 필요에 힘을 쓰면 학생들은 수업을 좋아했고,

내가 추구하는 본질과 학생의 필요가 일치하는 수업은 학생들이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재미있게 전달하면 라이킷과 조회수가 폭발했지만

본질에 집중하면 브런치 독자의 반응은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늘 학원에서든 브런치에서든

본질과 필요의 사이, 재미와 의미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허서진 선생이 다정하게 건네는 말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수업에 정답은 없다. 교사 개인이 선호하는 방식이 있고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결국 어떤 방식을 적용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있는가’이다. 어떤 수업을 하든 아이들의 성장과 성숙을 돕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모든 수업은 저마다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읽은 책의 제목 중에 마음 깊은 곳에 남은 것이 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라는 수도승이 쓴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보다 책의 제목이 마음에 쿡 박혔다. 우리는 틀리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산다. 정답을 찾기 위해 몰두하고, 오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기웃거린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갇히면 자만하고, 내가 틀렸다는 생각에 갇히면 불안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문장의 의존명사 ‘수’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 ‘어떤 일을 할 만한 가능성’을 뜻하는 ‘수’가 ‘틀리다’ 뒤에 붙으니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은 불안을 낮추고 자만을 잠재운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타인의 방식을 존중해야 하고,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자기반성은 필수다. 정해진 답이 없으니 자연히 오답도 없다. 오직 지금의 내가 내린 답이 있을 뿐.


지금 나는 본질을 좇아가보는 데서 내 수업의 답을 찾는 중이다. 본질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수업을 꿈꾸고 있다. 정작 아이들의 현실 문제인 수능 점수에는 별 보탬이 되지 못하겠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에 빚지는 마음으로 좀 다른 길을 가보려는 참이다. "

허서진,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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