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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인류 모두의 문화유산]

오세훈의 천박한 문화 인식을 규탄한다.

by 백승호



1. 서울에 고층건물은 이미 넘칠 만큼 많다. 여의도와 강남, 용산을 비롯해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충분히 세워졌다. 그런데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바로 앞 세운 4 구역에 145m짜리 고층건물을 세우겠다고 한다. 서울의 중심, 그것도 유네스코가 ‘인류의 기억’으로 지정한 종묘를 향해 초고층 빌딩의 그림자를 드리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다. 세계 주요 도시가 문화유산 주변에서 얼마나 엄격하게 조망축과 높이를 관리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오 시장의 주장은 도시계획의 기본 감각조차 결여된 것이다. 에펠탑 옆에 초고층 주상복합을 허용하지 않는다.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도 150m 타워를 세우지 않는다. 런던은 세인트폴 대성당과 왕궁, 의회청사 주변의 시야를 ‘도시의 금선’으로 지정해 수백 년간 지켜왔다. 도시 한복판에 빌딩을 짓더라도, 역사성이 있는 문화유산은 소중하게 보호한다는 최소한의 합의가 있다. 그런데 서울시는 오히려 이 원칙을 뒤집고 있다. ‘도시의 활력’ ‘녹지축 조성’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해 인류의 문화유산인 종묘 정면에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세우려 하고 있다.


2. 오세훈 시장의 논리는 표면상 ‘도시재생’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개발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세운상가 일대를 “판잣집”, “도시의 흉물”로 규정하며 고층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낡은 건물을 정비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자는 주장과 세계유산 앞에 마천루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시민이 반대하는 것은 노후 건물의 정비가 아니라, 종묘와 같은 세계유산의 역사성과 경관을 상실하는 것이다. 슬럼 개선과 초고층 개발을 동일시하는 것은 시민 여론을 호도하는 정치적 프레임일 뿐이다. 종묘 일대의 경관은 단순히 ‘지저분한 동네’가 아니라, 수백 년간 도심의 균형을 유지해 온 서울의 역사적 중심축이다. 그 축을 무너뜨리면서 “도시의 활력”을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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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울시가 내세우는 ‘남산~종묘 녹지축’ 구상도 실체를 보면 허상에 가깝다. 이름만 들으면 숲길이 열리고 바람길이 복원되는 듯하지만, 실제 계획은 양옆으로 낮은 건물에서 높은 건물로 점차 높이를 쌓아 올리는 구조다. 즉, 통로 하나를 열어주되 양옆으로 장벽을 세우는 셈이다. 시민이 종묘 앞에서 보게 될 것은 녹지가 아니라 빌딩의 절벽일 것이다. ‘녹지축’이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개발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언어다. 더 심각한 것은 서울시가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 유네스코에 약속했던 ‘경관 보존’ 원칙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점이다. 1995년 유네스코는 종묘를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서울시가 ‘주변의 고도 제한과 조망 보존을 준수하겠다’는 조건을 명시했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은 문화유산청이 제기한 소송을 각하하며 서울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제적 합의보다 개발 논리를 우선시한 판결이었다. 이 판결은 단순히 한 구역의 사업 승인이 아니라, 향후 모든 문화재 경관 논란에서 “대법원도 허용했다”는 선례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판결을 내린 대법원도 책임이 있으며, 개발 논리를 비호하는 일부 언론의 책임 또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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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묘는 서울시만의 것도, 대한민국만의 것도 아닌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는 독일의 두 도시 사례가 잘 보여준다. 하나는 실패의 사례인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의 사례인 쾰른 대성당이다. 드레스덴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바로크 건축과 정원도시가 예술적으로 조화를 이룬 탁월한 문화경관’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불과 5년 뒤, 도시 한가운데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4차로 다리를 건설하면서 유산의 핵심 가치가 무너졌다. 유네스코가 수차례 경고했지만, 주민 절반 이상이 “세계유산 지위가 필요 없다”라고 응답했다. 개발의 편익이 문화적 자산의 가치를 앞질렀던 것이다. 결국 드레스덴은 2009년 세계유산에서 퇴출됐다. 독일 정부는 “부끄러운 사건”이라 자성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다.


5. 반면 쾰른시는 같은 시기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다. 라인강 건너편에 고층 빌딩 단지를 세우려던 계획이 유네스코의 경고로 제동이 걸리자, 쾰른시는 스스로 고도 제한을 강화했다. 단기적 개발 이익을 포기한 대신, 도시의 정체성과 품격을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쾰른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매년 3천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며 도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문화유산의 보존이 오히려 장기적 공익과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낳은 대표적 사례다.

이 두 도시의 상반된 운명은 서울시와 우리 국민에게 분명한 교훈을 준다. 세계유산을 지키는 일은 단지 돌과 나무를 보존하는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정신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지키는 일이다. 드레스덴의 다리는 한 세대의 편의를 주었지만 그 도시의 명예를 잃게 했다. 반면 쾰른의 고도 제한은 한 세대의 불편을 감수했지만 천년의 자부심을 지켰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기억과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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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울의 종묘는 단순한 제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뿌리이자 창의성의 원천이다. 국가유산기본법 제2조는 “국가유산이 인류 모두의 자산임을 인식하고 그 가치를 온전하게 지켜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미래 세대에 더욱 가치 있게 전해주는 것”을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천명한다. 그러나 지금 서울시는 그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세계유산 앞에 고층 건물을 세우겠다는 결정은 한 도시의 단기적 개발을 위해 국가의 품격과 국제적 신뢰를 내던지는 일이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미래를 세우는 자본이다. 이익은 순간이지만 품격은 세대를 건넌다. 서울이 쾰른처럼 ‘기억과 품격이 살아 있는 도시’로 남을지, 드레스덴처럼 ‘명예를 잃은 도시’로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오세훈 시장이 진정 세계적인 서울을 꿈꾼다면, 더 높이 짓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건물의 높이를 높여 사업자의 이익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서울의 품격을 높여 공공의 이익을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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