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

-실학과 공화주의의 전통

by 백승호



1.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문장으로 정치의 본질을 압축했습니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정치가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두 축을 날카롭게 정의한 말입니다. 서생의 문제의식은 사회의 부정의와 불평등을 직시하고 바로잡으려는 윤리적 긴장감이며, 상인의 현실 감각은 그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계산과 실행의 능력입니다. 정치가 이 둘 중 하나만을 붙들 때 실패는 예약됩니다. 도덕만 있고 현실이 없으면 무력해지고, 현실만 있고 도덕이 없으면 냉혹해집니다.


2. 이를 철학적 언어로 옮기면, 서생의 문제의식은 공화주의이고 상인의 현실 감각은 자유주의입니다. 공화주의는 공동체의 공공성과 시민의 책임을 강조하고,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 추구를 중시합니다. 현대 정치에서 이 두 가치는 흔히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규제와 자유, 공공성과 시장, 평등과 효율은 양립 불가능한 대립항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흐름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실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치를 긴장 속에서 어떻게 결합하느냐였습니다.


3. 이 사유의 뿌리는 의외로 깊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은 이미 이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신수필』에서 깨진 기와 조각과 조약돌, 그리고 똥거름을 두고'진정한 장관'이라 말합니다. 당시 상식으로 장관은 궁궐과 성곽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암은 그 시선을 거부합니다. 버려진 기와 조각이 담장을 이루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조약돌이 마당을 장식하며 실용과 미를 동시에 구현하는 모습을 그는 주목합니다. 가장 더럽다고 여겨지던 똥거름이 농사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자원이라는 사실도 그는 놓치지 않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백성의 삶을 보살피고 나라의 힘을 키우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암은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묻는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높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쓸모 있고 삶을 지탱하는 것을 척도로 삼아 세계를 다시 봅니다. 이것이 실사구시입니다. 허위의 명분을 걷어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입니다. 동시에 그는 이용후생을 강조합니다. 백성의 삶을 실제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정치와 사상의 목적이라는 인식입니다. 실사구시는 서생의 문제의식이고, 이용후생은 상인의 현실 감각입니다. 연암은 이미 조선에서 이 둘을 하나의 사유로 통합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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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흐름은 한국 현대 정치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첫 번째 결합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반세기에 가까운 투쟁을 통해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켜낸 서생이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망명길에서도, 그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1997년IMF 외환위기라는 전례 없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그는 이념이 아니라 현실을 택했습니다. 노동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구조조정과 금융 개혁을 단행했고, 자유주의 시장 논리를 수용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동시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해 사회 안전망의 토대를 놓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 구조라는 서생의 문제의식을 외교적 현실 감각으로 풀어내려 했습니다.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은 그의 삶 자체에서 녹아 있던 언어였습니다.


5.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문제의식을 시민 참여와 권력 분산의 형태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지역주의의 사슬을 끊겠다며 호남 출신으로 부산에서 출마했고, 권력의 주체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검찰·국정원·언론 권력과의 전쟁은 그 서생적 문제의식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한미FTA 협상을 강행한 것은 자신의 지지 기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정이었지만, 장기적 국익을 앞세운 상인의 현실 감각이었습니다. 이라크 파병 역시 한미동맹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공적 책임을 져야 했던 선택이었습니다. 이상이 현실의 제약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는 고통스럽게 싸웠고, 그 싸움 자체가'정치는 현실 속에서만 구현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6.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 흐름을 제도적으로 안정시키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공공성을 확대하려는 서생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 지구적 재난 속에서K-방역은 공공의료 인프라와 사회적 신뢰가 위기 대응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선제적 진단 검사와 투명한 정보 공개는 방역의 효율성과 시민의 자발성을 동시에 이끌어냈습니다. 이것은 공화주의적 공공성이 자유주의적 개인의 삶을 실제로 지켜내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부동산 문제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드러났고, 검찰·언론 개혁은 완성되지 못한 채 이후 정치의 과제로 남겨졌습니다.


7. 이재명 대통령은 이 문제를 보다 실용적으로 다룹니다. 그는 개인의 이익 추구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주택 보유가 불법이 아닌 한 그 선택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그 이익 추구가 정책을 왜곡하거나 공공을 지배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익은 인정하되, 그 이익이 권력으로 전환되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나아가 특정한 이익이 과도한 이익이 되지 않도록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합니다. 공화주의적 통제를 자유주의적 문법 안에서 구현하려는 시도입니다.


8. 이 흐름을 종합하면, 한국 정치의 진화는 단순한 이념의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을 넘어, 두 가치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탐색해 온 과정이었습니다. 서생의 문제의식 없는 정치는 방향을 잃고, 상인의 현실 감각 없는 정치는 힘을 잃습니다. 연암이 기와 조각과 똥거름에서 질서를 발견했듯이, 정치 역시 현실 속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습니다.

결국 핵심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결합하느냐입니다. 자유를 억압하면 활력이 사라지고, 자유를 방임하면 불평등이 확대됩니다. 공공성을 외면하면 공동체가 붕괴하고, 공공성만 강요하면 개인이 질식합니다. 정치의 과제는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자유롭되 공공을 해치지 않고 공공선을 지향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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