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을 바라는 강순희 여사의 단단한 삶-
1.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면서 여러 장면 뭉클했습니다. 특히 단종(이홍위)이 유배된 청령포를 향해, 백성들이 강 건너에서 음식을 던지고 띄워 보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배로 접근조차 어려운 거리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은 강물을 건너갑니다. 억울하게 권력에 의해 쫓겨난 한 인간과, 그를 잊지 않는 사람들. 단종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과 백성이 단종을 향해 보내는 마음이 맞닿는 그 순간, 저는 인간을 끝내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권력은 한 인간을 고립시키고 침묵하게 만들지만, 백성들은 그 고립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손길이 단종의 무너진 삶을 다시 붙잡게 합니다.
2.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바로 그 손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선의 아내 강순희 여사의 삶을 기록한 구술 자서전입니다. 북만주에서 자라고 평양에서 꿈을 키운 뒤 전쟁을 겪고 남쪽으로 내려와 가정을 이루었던 한 여성의 삶은, 어느 날 국가폭력에 의해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 책은 삶을 살아냈던 단단한 한 사람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살아내는지, 그리고 그 답을 삶의 경험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찾아갑니다.
3.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존재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 관련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고문과 강압수사로 사건은 조작되었고, 1975년 4월 9일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16시간 만에 8명이 사형당했습니다. 법의 이름으로 집행된 이 죽음은 훗날 우리 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법살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재심을 통해 전원 무죄가 선고되며 국가가 저지른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의 재심과 진상 규명을 국가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제로 인식하고 과거사 정리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7년 재심에서 피해자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국가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헌신한 김형태 변호사를 비롯한 인권변호사들의 치열한 법적 투쟁 역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국가는 거짓으로 사람을 죽였고, 다시 법으로 그 거짓을 바로잡는 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4. 사진을 보았습니다. 단란했던 가족의 웃음과, 우홍선 선생이 목숨을 잃은 뒤 그 웃음을 지워야 했던 가족의 시간이 한 장 안에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국가폭력으로 인해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국가는 한 사람을 처형했지만, 그 죽음은 한 가족의 시간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형은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5. 강순희 여사의 삶은 바로 그 ‘되돌릴 수 없는 절망’ 위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남편을 잃은 순간, 삶은 무너졌습니다. 그녀는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함께 죽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딸 셋과 아들 하나, 네 자녀가 그녀를 붙잡았습니다. 그 작은 존재들이 무너진 세계 위에 다시 삶을 세우게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무엇인지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거창한 의지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유,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인간을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6. 놀랍게도 강순희 여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행복했다”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고, 좋은 남편을 만나 사랑하며 살았고, 남편의 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을 받았으며, 자녀들이 큰 탈 없이 자라주었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국가폭력으로 삶이 파괴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은 그 답을 단순하지만 강하게 제시합니다. 인간을 끝내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구조이며,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현실적인 힘입니다.
7. 이 책이 더욱 깊은 이유는 이 삶이 개인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기록과 연대를 통해 역사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유시민 작가는 강순희 여사의 구술을 받아 적으며, 사라질 뻔한 한 인간의 삶을 우리 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로 되살려 냅니다. 그는 이 기록을 통해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존엄을 지켜내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록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입니다.
8. 또한 이 이야기 뒤에는 정의를 되찾기 위한 오랜 시간의 싸움이 있습니다. 김형태 변호사를 비롯한 인권변호사들은 인혁당 사건 재심과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국가가 만들어낸 거짓을 법으로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법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때, 다시 법으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진실은 드러났습니다. 정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끈질긴 싸움과 연대 속에서 비로소 회복됩니다.
9. 이 지점에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그 힘으로 국민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단지 법원의 판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기억하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 속에서 완성됩니다. 인혁당 사건의 재심은 과거를 바로잡는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의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사건이었습니다.
10.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책장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문장을 읽다가 숨이 막히고, 눈물이 고여 한참을 멈춰 서 있었습니다. 이 책은 감동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내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사람은 사람 때문에 무너지지만, 다시 사람 때문에 살아납니다.
11. 국가폭력은 한 인간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관계, 그리고 기억과 정의를 향한 연대는 그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는 제목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사랑이 있으니 인간은 끝내 살아냅니다. 그리고 정의가 회복되어야 그 사랑은 비로소 온전히 인간의 삶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묻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 사는 세상’이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