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수집가의 시대]

-아날로그의 반격인가, 디지로그 지향인가-

by 백승호

1. 왕과 사는 남자, N차 관람이유는?

최근 관객들이 포맷별로 차별화된 체험을 통해 콘텐츠를 재해석하고 재소비하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뮤지컬과 콘서트를 여러 차례 반복 관람하는 이른바'N차 관람'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뮤지컬은 배역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콘서트는 요일별로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반복 관람이 이루어집니다. 동일한 영상 콘텐츠인 영화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화'왕과 사는 남자'를 본 관객 100명 중 8명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관람하는 이른바'N차 관람객'이라고 합니다. 2026년 4월 6일 CGV 등에 따르면'왕과 사는 남자' 관객 중2회 이상 관람한 관객은 전체의 5.2%, 3회 이상 관람한 관객은 3.0%라고 합니다. 즉, 전체 관객의 8.2%가 두 번 이상 관람한 셈입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3회 이상 관람 비율인데, 이는 역대 천만 영화 가운데 '서울의 봄'(2025),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함께 공동 1위입니다.

2.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소유에서 접근으로, 접근에서 경험으로

이 변화의 핵심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전환이 놓여 있습니다. 과거의 소비는 소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했습니다. 자동차, 집, 브랜드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플랫폼 경제가 확산되면서 이 구조는'접근' 중심으로 이동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음악을 소유하지 않아도 되고, 영화를 구매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제든 접속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근본적인 전환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느꼈는가를 중시합니다. 소비는 더 이상 지출의 총량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를 기록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경험의 멸종과 경험수집가의 시대.JPG

3. 송수진 교수는 『경험수집가의 시대』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물건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성해 간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샀는지는 금세 잊히지만, 무엇을 해보았는지는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기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됩니다. 내가 어떤 공연에 감동했는지, 어떤 이야기에 울었는지, 어떤 순간에 몰입했는지가 곧 나라는 인간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현상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왜 반복할수록 더 깊어지는가

4. 이 반복의 심리를 정밀하게 설명해 주는 연구가 있습니다. 소비자 행동 연구자이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 스쿨의 스티븐 호흐(Stephen J. Hoch) 교수는'제품을 경험하는 것은 유혹적이다(Product experience is seductive)'라는 논문에서 직접 경험이 왜 그토록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지를 네 가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 경험은 생동감 있고 감각적이어서 몰입하기 쉽습니다. 제한적인 내용이라도 직접 경험하면'많이 배웠다'라고 느끼게 합니다. 둘째,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는 신뢰됩니다. 광고와 달리 조작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경험은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애매모호한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미를 덧붙일 수 있고, 그 과정에서'깨달았다'는 감각을 얻습니다. 넷째, 경험은 취향에 맞춰 스스로 조정됩니다. 경험하는 과정에서 점점 자신의 취향과 맞는 선택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덜합니다.

이 네 가지 원리가 N차 관람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바탕입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감각으로 몰입하고, 두 번째에서는 감정을 인식하며, 세 번째에서는 의미를 해석합니다. 동일한 콘텐츠지만 경험하는 주체가 성장하기 때문에 매번 다른 경험이 됩니다. 반복 관람은 콘텐츠 소비가 아니라 자기 감각과 인식을 정교화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5. AI가 경험을 대리하는 경험 멸종의 시대

이러한 변화는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더욱 또렷해집니다. AI는 모든 것을 빠르게 만듭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요약을 제공하고, 영화를 보지 않아도 줄거리와 핵심 장면을 정리해 줍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훨씬 빠르게 소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중요한 것이 사라집니다. 결과는 남지만 과정은 사라지고, 이해는 남지만 경험은 얕아집니다.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점점 더 적게 느끼게 됩니다. 이 결핍이 바로 오늘날 소비를 다시 경험 중심으로 되돌리는 힘입니다.

송수진 교수는 이를 '휴먼 포지셔닝'으로 설명합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영역은 피지컬과 프로세스 두 가지로 압축하여 말합니다. 첫째 피지컬(몸으로 직접 겪는 감각)과 둘째 프로세스(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숨이 차오르고 손이 떨리며, 반복 속에서 의미가 축적되는 경험은 데이터로 복제되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은 결과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시행착오와 감정의 층위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AI가 '왕과 사는 남자'의 감동 포인트를 세 줄로 요약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요약을 읽은 사람은 '나는 그 장면에서 울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험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다시 자기만의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며 자기만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6. 디지로그—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의 반격

이 현상은 이어령 교수가 제시한'디지로그(Digilog)' 개념을 통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지로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두 영역의 긴장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개념입니다. 디지털은 효율과 속도를 극대화하지만, 그 자체로는 인간의 감각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도 아날로그적 경험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우리는 AI가 추천한 콘텐츠를 소비하지만, 그 콘텐츠를 다시 몸으로 경험하려 합니다. 요약된 정보를 접하면서도 직접 읽고 보고 느끼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위에 아날로그를 덧입히는 이 행위가 바로 오늘날 소비의 본질입니다.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한때 디지털이 모든 것을 대체할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되었습니다. LP 레코드판은 부활했고, 종이는 다시 매력적인 매체가 되었으며, 필름 카메라와 보드게임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선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닙니다. 디지털 경험에는 촉감도, 냄새도, 물리적 참여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콘텐츠는 동일한 화면 속에서 평평하게 소비됩니다. 반면 아날로그 경험은 다릅니다.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느끼고,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 비효율이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디지로그 아날로그의 반격.JPG

7. 이처럼 인간은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이 제공하지 못하는 영역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AI는 결론을 제공하지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나'를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결과보다 그 결과를 통과한 자신을 원합니다. 그래서 반복하고, 시간을 들이고, 과정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소비가 아니라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오늘날 경험은 더 이상 순간적으로 소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적하고, 기록하며, 공유하여 하나의 자산이 됩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에 감동했는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 상징 자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쌓기보다 이야기와 기억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서사가 바로 그 사람을 정의합니다. AI을 많이 활용하여 경험이 멸종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더 경험을 쌓아가며 살아가려 합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느림을 선택하고, 정보가 넘칠수록 감각을 찾습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사람들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 자산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복 속에서 깊어지고, 그 깊이 속에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또렷해집니다.

오늘날의 소비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쌓여 경험수집가의 시대에 자기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