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문방사우]

-키보드, 모니터, 콘텐츠, OS(AI)-

by 백승호

1. 신(新) 문방사우; 키보드를 바꾸고

키보드를 새로 샀습니다. 기계식 키크론 k10 pro se2 키보드입니다. 치는 맛도 나고 조용해서 좋습니다. 새 키보드로 처음 쓰는 글입니다. 자판을 두드리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처음 붓을 손에 쥐던 날이었습니다. 붓 한 자루를 고르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습니다. 털의 결을 손등에 대어보고, 먹을 머금는 탄력을 살폈습니다. 끝이 예리한 것(첨 尖), 털이 고루 펴진 것(제 齊), 모양이 둥근 것(원 圓), 수명이 긴 것(건 健). 벼루는 돌의 결이 고른 것으로 골랐고, 종이는 먹이 번지는 정도를 가늠하며 신중히 택했습니다. 그 고르는 행위 자체가 이미 글쓰기의 시작이었습니다. 도구를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쓸 말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글은 손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문방구를 고르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2. 최근에는 붓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만년필도 특별한 편지를 쓸 때만 꺼냅니다. 손은 훨씬 편해졌고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렇게 편리해진 시대에 글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쉽게 쓰고 쉽게 지울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깊고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문방사우(文房四友). 종이와 붓, 먹과 벼루. 선비들은 그것을 '도구'가 아니라 '벗'이라 불렀습니다. 붓은 마음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길이었고, 종이는 그 생각을 담아주는 그릇이었습니다. 먹은 글의 농도를 만들었고, 벼루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의 자리였습니다. 특히 벼루 앞에 앉아 먹을 가는 시간은 단순한 준비가 아니었습니다. 먹이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쓸 말을 가다듬고, 번지는 먹빛을 바라보며 마음의 결을 정리하는 시간. 그 느린 시간 속에서 생각은 응축되었고, 글은 비로소 깊이와 밀도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방사우는 무엇일까요.


3. 붓(筆)은 키보드가 되었습니다. 붓은 쥐는 방식에 따라 선이 달라졌습니다. 힘을 주면 굵어지고, 힘을 빼면 가늘어졌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가 글의 표정이었습니다. 키보드의 자판은 어느 손가락이 누르든 같은 글자가 나옵니다. 이 균질함은 효율이지만, 동시에 상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 붓의 개성이 획의 굵기에 있었다면, 키보드의 개성은 무엇을 얼마나 오래 생각하다 누르느냐에 있습니다. 자판은 평등하지만, 그것을 두드리는 생각의 밀도는 여전히 사람마다 다릅니다. 좋은 키보드는 분명 글쓰기를 돕습니다. 그러나 붓이 글씨를 대신 써주지 않았듯, 키보드도 생각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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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이(紙)는 모니터가 되었습니다. 종이에 한 번 쓴 글자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우개로 지워도 눌린 자국이 남고, 먹으로 쓴 글은 번짐의 역사를 간직했습니다. 모니터는 다릅니다. 완전히 지워지고, 무한히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깨끗함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실패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실패로부터 배우는 법도 함께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모니터는 종이가 결코 할 수 없었던 일도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1900R 곡률의 곡면 모니터는 화면이 시야를 따라 부드럽게 휘어져 있어, 화면 전체를 보기 위해 목을 앞으로 내밀거나 좌우로 크게 움직일 필요를 줄여 줍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중심에 머물고 화면과의 거리도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어, 자세를 조금 더 안정적으로 잡아 줍니다. 글을 쓸 때 몸을 덜 쓰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에 더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글이 살아 움직이고, 생각이 실시간으로 세상과 만납니다. 빈 화면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멈칫합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 망설임만큼은 종이 앞에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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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먹(墨)은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가장 근본적인 전환입니다. 옛날의 먹은 벼루 위에서 천천히 갈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은 단순한 준비가 아니라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의 먹, 곧 콘텐츠는 사방에 넘쳐납니다. 읽지 않아도 흘러들어오고, 원하지 않아도 쌓입니다. 문제는 농도입니다. 아무리 먹이 많아도 제대로 갈지 않으면 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콘텐츠를 소비해도 자신의 언어로 소화하지 않으면 글이 되지 못합니다. 정보를 먹으로 갈아내는 것 — 읽은 것을 생각으로, 생각을 언어로 바꾸는 것 — 그것이 오늘날 글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농도가 옅은 먹물로는 어떤 글도 오래 남지 않습니다.


6. 벼루(硯)는 OS가 되었습니다. 벼루는 먹을 담고 갈아내는 기반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없으면 먹도 붓도 종이도 제 기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벼루는 운영체제(OS)입니다. 키보드도, 모니터도, 콘텐츠도 결국 OS 위에서 작동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AI가 얹혀 있습니다. 벼루가 먹의 농도를 결정했듯, OS와 AI는 우리가 생각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규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벼루가 아무리 좋아도 먹을 가는 것은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OS가 아무리 정교하고 AI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무엇을 쓸 것인지 왜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벼루 앞에 앉은 사람입니다. 도구의 기반이 정교해질수록, 그 위에 앉은 사람의 사유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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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붓은 키보드로, 종이는 모니터로, 먹은 콘텐츠로, 벼루는 OS와 AI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도구는 새것이지만 글을 대하는 태도까지 새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요즘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키보드도 수집하듯 소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축이 다른 것으로, 소리가 다른 것으로, 디자인이 다른 것으로. 저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좋은 도구를 향한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존재>라는 책에서 에서 "우리는 지금 소유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존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소유 양식의 삶에서 키보드는 수집의 대상입니다. 더 많이 갖고, 더 좋은 것을 가지며, 갖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그러나 존재 양식의 삶에서 키보드는 다른 무엇을 위한 자리입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진실하게 쓰고, 그 글로 누군가의 삶에 작은 빛을 건네는 것. 도구의 가치는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방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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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물건을 사면 오래 쓰는 편입니다. 이번 키보드도 그럴 것입니다. 오래 쓰되, 잘 쓰고 싶습니다. 선비들이 붓을 벗이라 불렀던 것처럼, 이 키보드도 그저 소유물이 아니라 함께 생각을 가다듬는 벗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새 키보드를 받아 들며, 새 붓을 쥐던 그날처럼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습니다. 어쩌면 진짜 문방사우는 책상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벼루 앞에 앉아야 합니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서, 오늘도 한 줄 한 줄 진심을 다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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