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황금률]

-공자의 무고(毋固)와 나무처럼 선을 넘지 않는 지혜-

by 백승호

1. 우리는 살면서 참으로 많은 선을 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선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관심이고, 배려이며, 때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받는 쪽에서는 다릅니다.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선을 넘는 말은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가 됩니다.


이런 장면들을 겪을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서 공자께서 끊었다고 하신 네 가지, 그중 하나인 ‘무고(毋固)’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굳게 붙들어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선을 넘는 말은 대부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기준이, 타인에게는 강요가 되는 순간입니다. 강요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는 말의 중요성을 소설가 김애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뜨거운 위로의 온도 때문에 상대에게 정서적 채무감을 줄 수 있는데 (농담은) 비장함을 좀 낮춰서 상대를 정서적으로 빚진 상태로 만들지 않는 위로라는 생각도 듭니다.”(손석희 『질문들』)

김애란 작가의 말은 농담의 효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위로는 때로 부담이 됩니다. 선을 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관심은 받는 사람을 빚진 자리에 세웁니다. 고마워해야 할 것 같고, 해명해야 할 것 같고, 납득시켜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그 부담을 웃음 뒤에 숨기는 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배운 처세입니다.


2. 얼굴을 보자마자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하루를 멀쩡하게 시작하려던 사람은 갑자기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반대로 “요즘 너무 좋아 보인다”는 말도 편하지는 않습니다. 좋아 보이려면 전에는 나빠 보였다는 뜻이 되고, 그 기준은 철저히 말하는 사람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얼굴을 날마다 채점하면서도 그것을 배려라고 부르는 장면은 생각해 보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기준이 너무 쉽게 타인에게 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무고’는 무너집니다.

결혼 여부를 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은 했느냐”는 질문은 종종 “왜 아직 안 했느냐”는 추궁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없다고 하면 “외롭지 않으냐”가 따라오고, 하나라고 하면 “혼자라 외롭겠다”는 동정이 붙습니다. 셋이라고 하면 “어떻게 다 감당할 거냐”는 걱정이 쏟아집니다. 결혼을 해도, 안 해도, 아이가 있어도, 없어도, 하나여도, 셋이어도 늘 문제가 됩니다. 이쯤 되면 묻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정답인가. 아마 묻는 사람도 모를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기준을 기준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삶은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무고란 바로 그 기준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직장을 잃은 친구에게 “요즘 뭐 하느냐”라고 묻는 것, 이혼 후 혼자 사는 이웃에게 “혼자 사니까 많이 힘들지 않으냐”라고 건네는 것, 몸이 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요즘 살이 좀 찐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 이 모든 말의 공통점은 말하는 사람은 편하고, 듣는 사람은 불편하다는 점입니다. 그 불편함을 애써 웃음으로 덮어야 하는 쪽은 언제나 듣는 사람입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그 말을 받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볍게 던진 말의 무게는 결국 상대가 떠안게 됩니다.


3. 김애란 소설『달려라 아비』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을 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유형이 있습니다. 상대의 경계를 침범해 놓고, 정작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저 걱정해서 한 말인데”라며 오히려 미안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불쌍한 모습으로 동정심을 유발해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그 부담 때문에 말을 꺼내기조차 어렵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선을 넘어와 한마디 하려 하면 먼저 사과를 내세워 흐름을 끊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과 소통하기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동정심으로 말문을 막고, 소통을 은근하게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선을 넘은 쪽이 불쌍한 척 방어막을 치고, 선을 지키려는 사람은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만 태우게 됩니다.


4.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은 울타리가 아니라 경계입니다. 울타리는 막는 것이지만, 경계는 구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나의 영역이고, 저기부터는 당신의 영역이라는 표시입니다. 경계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선을 밟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을 언제 먹는지,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몇인지, 얼굴이 오늘따라 왜 그런지. 이 모든 것은 그 사람의 경계 안에 있는 일입니다. 현관문도 두드리고 들어가는데, 마음의 문은 왜 그냥 밀고 들어오는 것일까요. 자신의 기준을 너무 쉽게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논어에 공자께서 네 가지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子 絶四하시니 毋意, 毋必, 毋固, 毋我러시다.

자 절사 하시니 무의, 무필, 무고, 무아러시다.


그중에서도 ‘무고’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태도를 뜻합니다. 사람은 쉽게 자기 생각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기준 삼아 타인의 삶을 재단합니다. 선을 자주 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늘 바깥을 향해 있고,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단단하게 굳어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의 기준이 타인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은 가볍게 건네고 무게는 상대에게 남깁니다. 결국 선을 넘는다는 것은 경계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해서 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된 관계일수록 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사이에 뭘”이라는 말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친밀함은 무례의 면죄부가 아닙니다. 오래 알았다는 것은 더 잘 안다는 뜻이지, 더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고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 동네 카페에서 가끔 보는 얼굴, 명절에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친척. 이들과의 관계는 얕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것입니다. 적당한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냉담함이 아니라 예의입니다. 가깝지 않아도 따뜻할 수 있고, 거리가 있기에 더 오래 따뜻할 수 있습니다.


5. 김애란 소설『달려라 아비』의 또 다른 문장이 떠오릅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결국 선을 넘는 말의 진짜 동기는 상대에 대한 관심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묻는 사람은 편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불편합니다.

그러니 그냥 두셔도 됩니다. 있는 그대로.
결혼을 했으면 한 대로, 안 했으면 안 한 대로.
아이가 하나면 하나인 대로, 셋이면 셋인 대로.

그 단순한 태도 속에 ‘무고’가 있습니다.
남을 바꾸려 하지 않는 마음, 나의 기준을 내려놓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일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이전글[행복한 사람의 공통점;건강한 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