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학-기술권력시대]

-새로운 세계질서의 문법 ;기정학(技政學)-

by 백승호

1. 기술이 권력이 되는 시대 — 기정학(技政學), 새로운 세계 질서의 문법


지정학(地政學)이 지리적 위치나 관계에 따라 정치, 경제 등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기정학(技政學)은 기술적 우위가 국제정치의 패권을 좌우한다 새로운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기정학적 위상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글로벌 AI허브'유치다. 차지호 의원이 주도해 온 '글로벌 AI 허브' 유치 프로젝트가 유엔 주요 기구들과의 협력의향서(LOI) 체결을 계기로 본격적인 실행 단계에 들어섰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노동기구, 국제이주기구, 국제전기통신연합, 세계보건기구, 세계식량계획, 유엔개발계획 등 6개 UN 기구와 협력의향서에 서명하며 글로벌 AI 협력 플랫폼 구축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 사업이 아니다. 노동·보건·식량·이주와 같은 인류의 핵심 문제를 AI로 해결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국제 협력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실험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다. 과거 국제 질서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작동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연결 역시 대부분 이들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 AI 허브 구상은 다르다. 유럽이나 미국을 거치지 않고도 한국을 중심으로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지향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AI는 물리적 인프라나 기존의 제도적 네트워크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되며, 개발도상국들은 지금 서방이 설계한 틀 밖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다. 한국은 빠른 추격의 경험, 보편 언어인 수학과 코드로 이루어진 AI 기술 기반, 그리고 정치적 비동조 국가라는 이점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번 LOI 체결은 그 가능성에 유엔이 공식으로 응답한 첫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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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지금 기술이 권력이 되는 시대, 기정학(技政學)의 한복판에 서 있다.

플라톤의 『국가』는 "내려갔네(κατέβην, 카테벤)"라는 말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로 내려갔다는 이 짧은 과거형 동사에서, 일부 학자들은 철학자가 이데아의 세계를 떠나 현실의 동굴 속으로 기꺼이 내려오는 상징을 읽는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이상을 품고 현실로 내려오는 것—그것이 플라톤이 그린 철학자의 사명이었다. 지금의 국제 질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즉 기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기정학은 바로 그 현실 속으로 내려간 자들이 만드는 질서다.

기정학(技政學)은 기술과 정치가 결합된 개념이다. 과거의 지정학이 지리적 위치를 중심으로 국가의 운명을 설명했다면, 기정학은 기술적 우위가 국제 질서를 결정한다.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 기술, 에너지 기술은 더 이상 산업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안 보이고 외교이며, 곧 국가의 생존 조건이다.

이 변화는 이미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이념 충돌이 아니라 기술 패권 경쟁이다. 반도체 수출 통제, AI 기술 규제, 공급망 재편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기술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술을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동맹이 형성되고, 시장이 재편되며, 국가 간 관계가 결정된다. 기술은 세계를 조직하는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3,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서 있을까.

한국은 지금까지 '추격 국가'였다. 선진국이 만든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며 성장해 왔다. 이 전략은 탁월했다. 그러나 기정학 시대에는 추격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술의 규칙을 만드는 쪽과 따르는 쪽은 전혀 다른 위치에 선다. 추격자는 언제나 설계자의 뒤에 있다.

지금은 그 전환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처음으로 갖춰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AI 연구 논문 수와 특허 출원에서 이미 상위권에 있다. 무엇보다 노동·보건·식량·이주 같은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 AI' 방향에서 중립적 플랫폼으로 인정받을 국제적 위상이 있다. 글로벌 AI 허브는 이 전환을 상징한다. 기술을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기술의 규칙과 표준을 설계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시도다. '추격 국가'에서 '설계 국가'로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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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첫째, 핵심 기술의 내재화다. 인공지능, 양자 기술, 에너지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이 기술을 잃는 순간 우리는 종속된다. 특히 AI 반도체와 파운데이션 모델 역량은 어떤 기술 동맹도 대체할 수 없다.

둘째, 그 위에 기술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 모든 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핵심이 내재화되어 있을 때에만 동맹은 대등하다. 핵심 없는 동맹은 결국 의존이다.

셋째,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 투자다. 초격차 기술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패를 감수하는 연구 환경과 10년, 20년의 시야가 필요하다. 당장의 성과를 요구하는 시스템에서는 진정한 원천 기술이 나오지 않는다.

넷째, 표준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기술을 만드는 것과 그 기술의 언어·규범·윤리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한국이 글로벌 AI 허브를 통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 감각과 다자 협력의 경험이 필수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안'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5.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공지능은 패턴을 학습하고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질문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간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정의를 묻고,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 순간, 기술은 권력이 아니라 지배가 된다.

기정학 시대의 본질은 단순하다. 기술이 권력을 만든다. 그러나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이 결정한다.


6. 글로벌 AI 허브는 시작일 뿐이다.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다. 우리는 기술을 가질 것인가를 넘어서, 기술로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정학 시대는 위기이자 기회다. 그리고 그 기회를 현실로 바꾸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결국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처럼, 이상을 품고 현실로 기꺼이 내려오는 것—그것이 지금 한국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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