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이야기
© aditya1702, 출처 Unsplash
며칠 전 환자분이 진료 후 나가시며 작은 봉지를 꺼내어 내미신다.
이 이야기를 환자에게 선물을 받은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환자분에게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최근 멀리 이사를 오면서 아이가 어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가까운 곳으로 이직을 했다.
이곳에는 당뇨, 고혈압 환자분들이 많다.
물론 어디를 가도 당뇨와 고혈압은 많지만 그 와중에도 이곳에는 유독 많은 듯하다.
고혈압, 당뇨 환자가 많다는 것은 장기 환자분들, 나와 자주 만나게 되는 분들, 이제부터 꾸준히 관계를 이어갈 분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며칠 전, 한 당뇨 환자분에게 약을 처방해 드리고 식습관과 운동을 설명해 드리는데, 끝나고 나가기 전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주신다.
"이거 선생님 심심할 때 먹어요."
"아니에요 저는 군것질 안 하니까 갖고 계시다가 필요할 때 드세요."
"아니야 나 안 먹기로 결심했어. 안 먹을 거니까 꼭 좀 받아둬요. 선생님 주려고 일부러 가져왔어."
사탕 봉지를 나 있는 쪽으로 밀어내시고는 서둘러 나가 버리신다.
내 책상에 남겨진 빨간 딸기 젤리 한 봉지...
이 빨간 젤리를 맛있게 드실 할아버지의 모습이 귀여우실 거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도 귀엽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때로는 왜 이리 귀여우신지…^^
이 젤리가 그분이 엄청 사랑하는 간식임에 틀림없을 텐데 포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셨는데 다시 돌려드릴 수도 없고... 결국 그분의 결심에 감동이 되어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난 젤리를 먹지 않기에 이 빨간 젤리 한 봉지를 서랍 한편에 모셔 두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환자분들에게 선물을 많이 받았다. 레지던트 때는 유독 편지도 많이 받았다. 어떤 분은 퇴원하면서 편지를 써주시기도 하고, 또 병원 떠나면서 칭찬 카드를 써주시기도 했다. (칭찬 카드를 받으면 원내 메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메일이 오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먹을 것을 주시는 분도 있고, 만든 듯한 수공예품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환자가 주시는 마음의 선물은 힘든 삶의 격려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늘 받은 젤리는 그때의 선물과는 다른 의미가 새롭게 있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넘어서 용기를 내신 분 덕분에 나도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젤리도, 과일 주스도, 사탕도 먹지 않는다. 짠 것을 안 먹으려고 국물도 먹지 않는다.
나는 비만도 아니고 오히려 마른 편에 속한다. 그리고 현재 특정 병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가족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뿐 아니라 협심증, 위암, 부비동암 등 여러 질환들을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겪으셨다. 할아버지는 2년 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수술도 여러 번 하셨고, 지금도 약물 복용 중이시다. 그래서 나도 관리를 하려고 단 음식, 짠 음식을 안 먹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간식을 아예 안 먹는 건 아니고 젤리, 주스 외 다른 단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 함정이긴 하다. 하지만 환자들을 보면서 나도 단 것들을 함께 줄여나가고 있는데 확실히 과자를 줄였다. 아니, 이제 거의 끊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사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니... 먹고 싶지 않아 졌다고 해야 할까. 참 신기하다. 어쩌면 이게 정말 환자가 나에게 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식습관 변화가 바로 환자의 두 번째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말 고마운 선물!
아직 남은 커다란 산이 두 개나 있긴 하다. 과자, 젤리, 사탕은 이제 끊었는데 가끔 생각나는 빵과 아이스크림이 문제다. 떳떳하게 질환에 대해서, 생활 습관 변화에 대해서 교육할 수 있기 위해서 또 환자들을 위해 나도 조금 더 줄여가야겠다.
그분의 비장한 각오가 이어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