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6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1월 10일(주일)

제목: 몰래 해야지요

본문: 마태복음 6장 1~4절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표준새번역, 3~4절)

최근 들어서 자주 쓰이는 말은 ‘눈 떠보니 다시 후진국’이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표현이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다시 좋은 지도자를 만난다면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눈 떠보니 다시 후진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나아진 형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보다 모든 면에서 대단히 열악했던 어린 시절 학교에 가면 늘 불편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학급별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누굴 도우라고?’ 있는 집 아이들이야 뿌듯한 마음과 자랑스러운 심정으로 봉투를 함에 넣었지만 저 같은 아이들은 고역이었습니다. 돈 넣을 봉투 사기도 부담스러웠거든요.


언젠가 TV를 켜면 불우이웃 돕기 생방송이 전국으로 전파를 탔습니다. 남녀 아나운서가 진행을 한 그 프로그램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음 분 모시겠습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요? 예쁜 따님이랑 같이 오셨네요.”

“네, 저는 서울 00동에서 온 000이라고 합니다.”

“그러시군요. 이 성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좋을까요?”

“아 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금은 여기 함에다 넣어주세요. 그럼, 다음 분 모셔보겠습니다.”


그분들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못해서 단언할 수 없겠지만 TV 생중계였기 때문에 더 열심히 참여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도 전국으로 방송을 타는 기회였고요. 저는 여태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TV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는 아마도 평생 자랑거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1~2절)


은밀하게 하라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누군가의 눈도장을 찍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하여,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투자하는 셈 치고, 회사나 단체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구제를 한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동기는 무척이나 서글프다는 생각입니다.


구제하는 일에 별로 동참하지도 않으면서 말만 많다고 타박할까 봐 걱정이지만 요즘은 불우이웃을 돕자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TV 생중계도 하지 않은 것 같고요. 혹시 제가 그런 분위기를 몰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자: 2024년 11월 11일(월)

제목: 제가 부르짖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5~8절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표준새번역, 6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8절)

요즘 제가 하는 설교 가운데 기도가 주제인 경우가 적지 않네요. 새벽기도회 때도 그렇고 수요예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에 관한 설교는 설교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듣는 성도들에게도 그러합니다. 우선, 설교할 거리가 많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서 이와 관련한 구절들과 이야깃거리들이 무궁무진합니다. 특히 기도응답을 주제로 설교하면 즉시 이른바 ‘은혜로운 말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참 다양한 기도유형이 있더군요. 침묵기도, 부르짖는 기도,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통성기도, 40일 작정기도, 21일 작정 다니엘기도, 회개기도, 방언기도, 치유기도, 예언기도, 서원기도, 릴레이기도 등입니다. 제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유형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제가 신앙생활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결정적인 동력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제게 신앙을 심어주신 분들이 하나 같이 기도를 많이 그리고 간절하고도 뜨겁게 드렸던 분들이거든요. 지금도 그분들이 하나님께 밤낮으로 간구하시곤 했던 목소리가 제 귀에 쟁쟁합니다. 덕분에 저도 여태 침묵기도보다는 부르짖는 기도에 익숙합니다. 반면에 장로교 통합 측 교회 출신인 제 아내는 저와 결혼한 지 36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부르짖는 기도를 힘겨워합니다. 그냥 조용히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어느 날 제가 물었습니다.


“여보, 그렇게 조용히 기도하면 졸리지 않아? 나는 내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 귀로 들으면서 해야 기도가 되는데. 참 흥미롭네.”


아내는 오히려 제가 잘 이해가 안 된답니다. 그냥 조용히 기도하면 되지 무얼 그리 큰 소리를 내지르는지 되묻습니다. 아내가 다녔던 장로교회들은 되다 침묵 기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합니다. 예전에 비해서 제 기도소리가 훨씬 작아졌습니다. 성대결절로 한 동안 고생을 한 뒤부터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소리 크게 지르지 말라고. 또다시 성대결절이 되면 설교하기 어려울 거라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 신경이 쓰이나 봅니다.


요즘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왜 그리 꽥꽥대며 기도했을까? 저 같은 경우는 순전히 환경 탓입니다. 본래 제가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 기도하면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교회분위기 가운데 기도를 배워서 그럴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상 제가 일반대학에는 원서조차 쓸 수 없었던 상황 때문입니다. 어린 저로서는 대학을 가지 못하면 제 삶은 곧 실패! 이런 생각이 강했으므로 그저 신사적으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등록금을 해결해 달라고,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당장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데 나는 꼭 대학에 가고 싶으니 기적을 보여 주십사고...


당시 제 기도는 절규였습니다. 울부짖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코 조용히 기도할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관련 말씀이 나오면 처음 기도를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눈물이 납니다. 그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자: 2024년 11월 12일(화)

제목: 균형이 필요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9~10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표준새번역, 9~10절)

저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기도란 내 소원을 이루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때는 제 삶의 미래가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것 같았기에 어찌하던지 빠져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절규했고 금식했으며 밤이고 낮이고 울부짖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누군가 손가락으로 볼을 툭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먹을 것을 주나 싶어서 그런지 반응을 합니다. 대단히 원초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정신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린아이 같아질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신자들을 보면 측은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신앙적으로 제법 성숙한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과 비교해 볼 때 신앙생활을 시작한 때로부터 아주 짧은 시기에 신학대학을 들어갔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남들보다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후 역사와 현실상황이라는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 내용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더군요. 나라를 위하여,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을 위하여, 사회정의를 위하여 이와 같은 보다 거시적인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제 자신의 일신상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애 처음으로 설교를 한 것은 신학대학 3학년 재학 중일 때였습니다. 고등부 총무교사로 사역을 할 때였는데 당시 지도목사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거의 몸살을 앓다시피 하면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마침내 행한 첫 설교 제목은 ‘통일이여 오라!’였습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나의 소원>을 일부 인용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제 기도에 제법 균형이 잡힌 계기는 본격적으로 목회현장에 발을 내딛고부터였습니다. 신학서적 역사와 사회과학서적에서 접하는 세상과 교우들이 일상을 살고 있던 세계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거시적인 주제를 붙잡고 목회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간절했습니다. 사업, 진로, 불경기, 취업, 결혼, 대인관계 등 땅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이 다시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더군요.


제 나이 만 23세 때 저는 대구에 있는 아주 아담한 교회에서 전임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40대 초반의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목회경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일은 날이 갈수록 복수가 차서 고생하시다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신 어느 젊은 집사님입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1987년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책감! 꽤 긴 시간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제 기도는 거시적인 문제와 일상의 문제를 균형 있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일자: 2024년 11월 13일(수)

제목: 정말 쉽지 않은데요

본문: 마태복음 6장 11~15절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공동번역 개정판, 14~15절)

성경을 읽으면서 종종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우리가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일들을 요구하셨을까? 그럴 리가 있나요?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기처분 하지는 않으시고 도리어 완성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고서 자유 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예수님께서 힘주어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보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왕왕 ‘야! 율법을 지키는 일 못지않게 실천하기 부담스럽고 주저되는 걸.’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것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예를 들어, 음주운전을 하다가 내 가족 중에 누군가를 사망하게 한 이가 별다른 반성 없이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학폭은 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내 아들이 학교에 갔다가 일진들의 손에 맞아서 실명을 했다고 합시다. 또는 학폭에 의하여 뇌를 크게 다쳐서 장애인이 되었다고 칩시다.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세월호 유족들이나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잃으신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날 이후 무슨 정신으로 살아오셨을까? 그분들의 심장은 무슨 생각일까? 숨은 제대로 쉬고 사실까? 가슴속 깊숙한 패인 상처와 아픔은 어떻게 달래며 살고 계실까?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았을 것인데 혹시 피가 맺힌 눈물방울을 흘리시는 것은 아닐까? 관련자들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은 일어나지 않을까? 당장이라도 아들을 뒤따라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으실까? 그분들을 향한 질문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용서하라니요. 그들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는데요. 아니 책임자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진상도 아직 미궁에 빠져 있고요. 남은 것은 원통함과 억울함과 고통인데 용서를 하라고요? 그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율법보다 더한 요구를 왜 하시는 것입니까? 저쪽은 전혀 사과할 생각이 없는데 먼저 용서를 베풀라고요?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런 의문도 자꾸 들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50년 가까이 중이염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다행히 2년 전 수술을 받아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 세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하나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육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고생이 더 컸습니다. 제가 그렇게 된 이유는 제가 기억할 수도 없는 어린 시절 동네 형들이 제 귀에 돌을 집어넣어 고막이 상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수술 때 인공고막을 만들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실천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말 어렵지만 꼭 실천하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실천하고 나면 그 이유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먼저 용서하라! 그래야 주께서 용서하신다.



일자: 2024년 11월 14일(목)

제목: 티가 납니까

본문: 마태복음 6장 16~18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표준새번역, 17~18절)

티가 난다 혹은 티를 낸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제게 오랫동안 따라다닌 ‘티’가 있었습니다. 군인 티입니다. 11년간 군종장교로 근무하다 보니 저도 모르는 새 군인, 그것도 장교 느낌이 몸에 배였던 모양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여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는데 말입니다.


그 티를 빼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말투로부터 걸음걸이, 사람을 대할 때의 표정, 헤어스타일,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 생각, 판단기준, 설교내용과 스타일, 인사법, 앉는 자세, 노래하는 태도 등 정말 다양한 영역에서 ‘티 빼기’를 했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저보고 군인 같다는 말을 하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다.


지난달 현역 군종목사님들 몇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소령 세 분에 중령 한 분이었습니다. 근무 연한이 최소 10년은 된 분들일 것입니다. 대부분 초면인 그분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동안 속에서 연신 웃음이 나왔습니다. ‘나도 저랬겠구나!’ 아마 본인들은 못 느꼈을 것입니다. 제가 20여 년 전 전역하기 전까지 그랬던 것 같이 말하고 인사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장교 티가 물씬 풍겼습니다. 머지않아 그분들도 저처럼 인생 세탁소에 수년 동안 들락거려야 되겠지요.


티가 난다는 것이 나쁘다거나 문제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를 가도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교양 있는 사람, 양심 있는 사람, 상식이 있는 사람,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 제대로 배운 사람, 이타적인 사람, 섬기는 사람, 희생적인 사람 등 좋은 티가 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단순한 이미지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그래야 하겠습니다만.


예수님을 생각하면 종교인 티 또는 도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티는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에게서 풍겼겠지요. 바리새인들은 멀리서도 티가 나는 옷을 입었고, 기도를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꼭 티를 내면서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지적하고 계신 저들의 문제점들을 음미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구제를 해도 돕는 티를 냈고, 금식을 해도 꼭 ‘나 좀 봐주세요. 나 지금 금식 중이에요. 나 대단하지 않아요? 나 좀 본받으세요.’ 이런 식으로 생활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티 좀 내지 마요. 꼭 그렇게 종교적인 사람으로 비춰야 되겠어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사람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제게는 그렇게 들립니다. 세례 요한도 종교적인 티가 확 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생활한 장소도 그렇고, 의상도 그랬으며 먹는 음식은 더욱 감출 수 없는 증거물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은 세례요한과도 차별화를 이루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생활인 느낌이 더 강했을 것 같습니다. 동네 아저씨! 친근하고 다정하고 예의 바르고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선한 사람. 목소리는 자연스럽고 걸음걸이도 매력적이고. 잔뜩 종교인 치장을 했으나 척 봐도 싼 티가 나는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예수님 아닐까요?



일자: 2024년 11월 15일(금)

제목: 왜 모르겠어요 다 알긴 하지요

본문: 마태복음 6장 19~24절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간다. 그러므로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표준새번역, 19~20절)


정확하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훨씬 더 젊었던 시절에 이런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같이 벌으랬다 돈만 벌어라 / 더러운 돈 좋아하네 돈만 벌어라 / 새 돈 헌 돈 따로 있나 / 돈만 벌어라 / 아무거나 시키세요 돈만 벌어라 / 인정 찾고 양심 찾고 / 개소리들 하덜마라 / 정승처럼 쓰면 됐지 / 돈 벌어 돈만 벌어’


개인적으로 방송을 통해서 접한 것 같지는 않고 주위 분들에서 처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조금 불분명한데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청년부 모임에 나갔다가 알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한 편으로는 대단히 신나게 그러면서도 울적한 마음으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호주머니에 돈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검색을 좀 해보니 이런 유의 노래를 부른 이들 가운데 유명한 고 김정구 선생도 계셨더군요. 제목부터가 선명합니다. <돈타령>인데 1939년 2월에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하신 것이랍니다. 이런 노래를 예전에는 만요(漫謠)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역시 낯설어서 구글에서 확인하니 만요라는 말은 ‘익살과 해학을 담은 우스개 노래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발생한 코믹송 장르를 일컫는다. 1930년대의 주류 대중음악은 트로트나 신민요였는데, 만요는 이들 주류와는 전혀 다른 일상생활의 소소한 내용을 가볍고 자유로운 가사에 담아 표현하면서 하나의 장르로 형성되었다.’고 하는군요. 가사가 정말 민요 답네요.


<에~~ 헤에~ 헤에~ 헤에~ 헤에 에~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 돈바람이 불어온다 / 돈~ 돈~ 돈~ 돈~ 돈바람이 / 오 전 짜리 전차 바람 / 십 전 짜리 담배 바람 / 오십 전 짜리 런치 바람 / 돈이야 돈이야 돈 돈 돈 돈 돈~ / 돈돈돈돈돈 돈~ / 허어~ 허어~ 허어~ 허어 어~ / 사대문 구녕으로 돈바람이 / 어허 불어온다.>


3절까지 되어 있네요. 어떤 분위기일까 싶어 유튜브를 클릭해 봤습니다. 역시 있네요. 아주 맑은 김정구 선생의 목소리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접했던 그 돈타령이나 김정구 선생이 부른 돈타령이나 그런 류의 노래는 다 같은 메시지를 닮고 있습니다. 돈이 다냐? 그런데 왜 눈만 뜨면 돈돈돈 하냐? 돈이 행복을 갖다 주냐? 돈이 사랑을 선물하냐? 아니지 않니? 그런데 왜 돈돈돈 거리며 사냐? 돈 없이는 못 살지만 돈만으로도 못 산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돈돈돈 그러다 돌거나 아니면 파멸의 길을 걸을 수 있어!


사실 머리로는 다 압니다. 이런 메시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현실로 돌아가면 너도나도 돈돈거립니다. 저 또한 목회자로서 돈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교회 재정이 조금 더 풍성했으면 여기저기 후원도 더 많이 하고 평소 꿈꾸던 일들도 진행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마음조차 내려놓습니다. 다음 말씀은 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공동번역개정판, 딤전 6:9~10절)



일자: 2024년 11월 16일(토)

제목: 먼저 구해야 할 것이라니요

본문: 마태복음 6장 25~34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공동번역 개정판, 33~34절)

산상수훈 설교를 처음에 들었을 청중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부자들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다수는 그랬을 것입니다. 사복음서 전반을 고려했을 때 말입니다.


노후 대비는 꿈도 꾸지 못했을 가난한 민초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버거웠을 밑바닥 사람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표준새번역, 25~26절)


요즘말로 하면, 주식투자로 호주머니가 든든한 사람들 그리고 비트 코인에 투자해서 꽤 많은 이익을 본 사람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셨더라도 오해받기 안성맞춤인데 말입니다. 새벽 4시에 이미 통근버스에 오르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귀에는 예수님 설교가 어떻게 들릴까요? 문제는 예수님 설교는 여기에 그치지 않잖습니까?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30~32절)


예수님께서 현실을 잘 모르셨던 것일까요? 혹시 구름 위에서 사셨거나 또는 동굴 속에서 사시다 몇 년 만에 나오셔서 감각을 잃어버리셨던 걸까요?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는 말씀은 이와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하나님을 잘 섬기면 점차 생활이 나아지고 넉넉해지고 마침내는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될 것이다. 바알신앙 숭배자들도 결국은 그런 소망을 품고 모여든 것 아닙니까? 현실에 잘 부합하는 신 말입니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수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고 마실까 와 같은 경제문제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둘째, 현실적으로 여유롭고 넉넉하게 살기 위해서는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해야 한다는 점도 잘 아신다. 셋째, 그렇다고 민초들이 잘 살게 된다거나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아신다. 넷째,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확고히 서지 않는 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언제나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초들이 게으르고 향락에 사로잡혀서 가난에 허덕였던 것일까요? 근본원인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에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경제구조가 현저히 뒤틀려 있었습니다. 평화와 평등 정의. 이런 것이 추구되지 않는 한 가난은 영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아프리카와 동남아 민초들이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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