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별들이

마태복음 5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1월 2일(토)

제목: 어떻게 해야 마음이 움직일까요?

본문: 마태복음 5장 1~6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표준새번역, 3~4절)


최근 묵상한 말씀 중에 대단히 인상 깊은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공동번역 개정판, 9절)


대상이 뚜렷하네요. 나 잘랐다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옳아.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아주 잘하고 있어. 누가 뭐래도 내가 가는 방향이 맞아. 그러니 자꾸 시비 걸지 마. 왜 자꾸 나를 비난해? 내가 옳은데. 너희들이 뭘 알아? 내 마음 알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그래. 다 잘 되자고 하는 일인데. 뭐 이런 나름의 자부심과 뿌듯함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네요.


예수님 비유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 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표준새번역, 11~12절)


얼마나 잘 났습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공적조서를 발표하고 있다니요. 지금 대통령께 표창을 상신하는 중인가요? 제가 군종목사로 있을 때 이런 것 매년 썼는데요. 나는 이런 좋은 일 많이 했고 또 저런 일도 많이 해서 부대를 빛냈으니 평정 잘 주시고 가능하시면 부대장 표창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매년 한 번씩 쓰다 보니 나중에는 다들 유사한 문구들을 몇 개씩은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바리새인이 드린 이 기도문을 읽는데 왜 공적조서 꾸몄던 일이 떠올랐을까요? 문구는 다르지만 취지가 비슷한 느낌이 드나 봅니다.


이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더군요.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표준새번역, 13절)


그는 동족에게 떳떳하지 못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했습니다. 동포들의 피를 빨아 착복했고요. 먹고살자고 로마황제에게 바칠 세금과 분봉 왕에게 상납할 돈을 확보한 후에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요. 그런데 감추지를 않는군요. 잘못을 정당화시키지도 않고요. 죄송하다고 면목 없다고 부끄럽다고 솔직히 시인하는군요. 물론 사과 쇼를 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세리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사과를 개한테 주면서 벌이는 쇼가 사과 쇼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도 진실한 사과입니다. 정말로 뉘우치는 기도입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 평가는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진심이어야 하나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참되어야 사람 마음도 움직입니다.



일자: 2024년 11월 3일(주일)

제목: 내 눈앞에 별들이

본문: 마태복음 5장 7~12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표준새번역, 8절)


요 며칠 맑은 하늘 덕분에 어여쁜 별들을 볼 일이 많아졌습니다. 여기도 반짝 저기도 반짝. 그렇지만 똑같은 밝기는 아니고 때로는 조금 파르르 뜨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뚫어져라 쳐다보니 부담이 돼서 그런 걸까요? 아님 왠지 부끄러워서? 수줍음을 타는 건가요?


정확하게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해 밤하늘의 별 이름을 공부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하늘에서는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을 정도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별들 중에서 아주 주요한 것들은 다들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제가 이해가 되지 않아 쩔쩔 매고 있을 때 저보다 3학년 위에 재학 중이던 제 바로 위의 형님(나이는 저보다 네 살 많습니다.)이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덕분에 별자리에 관한 한 제 성적은 늘 100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지금은 아는 것이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별은 단연코 북두칠성입니다. 그때는 ‘똥바가지 일곱 개’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농촌 마을 화장실이 푸세식이었는데 거름을 만들기 위해 변소에서 대소변을 퍼낼 때 사용한 바가지 모양과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북두칠성에다 그딴 이름을 붙일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공부를 포기한 사람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암튼 거의 컴퓨터 수준으로 별 이름을 알아맞혔던 제가 다시 원점에서 쩔쩔매는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황당합니다. 비록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별을 바라볼 때 제 마음은 시인이요 음악가며 미술가입니다. 아! 철학자도 되고 신학자도 되는군요. 물론 대중가수도 되고요.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 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는 제목의 대중가요 초입 부분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쓴 이도 밤하늘의 별을 보는 순간 시인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작곡가도 마찬가지고요.


윤동주도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썼지요. 어느 밤하늘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도 저처럼 별을 감상하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어느 블로그에서 일부를 인용했는데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시인은 과연 밤하늘 별자리 이름을 몽땅 다 외웠을까요?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별들이 그의 온몸과 마음과 정신을 휘감았겠지만 그는 홀로였던 모양입니다.


별은 맑은 날씨에만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미세먼지가 짙게 끼면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가 자욱해도 안 보입니다. 구름이 가려도 그렇고요. 분명 어렸을 때 보았던 무수한 별들과 지금 사이에 얼마나 변했을까요? 변한 게 없겠지요. 겨우 50년 세월이 흐른 것뿐인데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군요. 맑아야 보인다!


맑고 진실하며 깨끗하신 하나님을 과연 죄인 된 우리 눈과 마음으로 얼마나 밝히 볼 수 있을까요? 청결해야 보인다는 말씀이겠네요. 물론 우리 육안 으로 보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일자: 2024년 11월 4일(월)

제목: 행실을 똑바로 해야겠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5장 13~20절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폐지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표준새번역, 19~20절)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제가 가졌던 최초의 기억은 비교적 호의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몇 차례 간 것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중학생 시절 친구를 따라 몇 번 갔을 때는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부산 영주터널 부근에 있었던 장로교 통합 측 교회였지요.


그때 저를 처음 교회로 인도했던 친구는 현재 그 교단 소속 목사로서 열심히 목회하고 있습니다. 사역지는 경남 김해입니다. 제가 통영에서 목회할 때 그곳에 가서 헌신예배 설교를 한 번 했는데 정말 감격스럽더군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어졌는데 거의 37년 만에 만난 것이니까요. 평소 가끔씩 그 친구가 생각이 나곤 했는데 혹시 목회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더군요. 물론 제가 열심히 구글링을 해서 찾았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의 그 감격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동기동창으로는 유일하게 연락이 닿고 있는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영주 터널 부근에 있는 그 교회는 규모가 작았습니다. 학생들도 채 30명이 모이지 않았던 것 같고요. 다들 신실해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야말로 일당백을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대부분 학교생활을 잘해서 지금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공부 잘하고, 깨끗한 용모에다, 예의가 바르며, 상냥했지요. 모범 학생들이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생겨났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깨진 곳은 다름 아닌 고등학교에 가서였습니다. 부산에서는 유명한 미션 스쿨이었고 제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참 좋은 학교였습니다만 적잖은 실망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미션 스쿨이다 보니 신앙교육을 지나치게 반강제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교직원들도 다 기독교인들이었고요. 교장 선생님은 목사님, 교감은 장로님 그리고 웬만한 선생님들은 다 교회 장로 권사 아니면 집사였습니다. 술 마시고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가 나서 얼굴 일부를 다친 채 수업을 진행한 어느 선생님도 자신이 세례 교인이라고 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선생님들과 학생들 중 상당수가 ‘개나 소나 다 기독교인’이다 보니 욕이 입에 발린 녀석도 교인이었고, 수업시간에 늘 잠만 자다 쉬는 시간이면 잽싸게 도시락을 까먹는 녀석도 교인이었습니다. ‘아니, 저런 불량학생도 교회를 다녀?’ ‘아니 저 녀석은 완전 깡패 같은데 어떻게 저런 애가 교회를 다 다니지?’ 툭하면 여자 애를 만났다는 둥 거의 날라리 같은 애도 교회에서 임원을 한다고 하니 그때만 해도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던 저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종교 란에 저와 함께 당당히 불교라고 표기했던 몇몇 친구들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정직했습니다.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실을 보고 그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를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우리들의 삶일 테지요.



일자: 2024년 11월 5일(화)

제목: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할 텐데요

본문: 마태복음 5장 21~26절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공동번역 개정판, 21~22절)


저는 여태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본 일이 없습니다. 살인하는 장면을 본 일도 없습니다. 아니 사람에게까지 갈 일도 없네요. 보신탕 끓여 먹는다며 개를 잡는 광경을 본 일도 없습니다. 소나 돼지도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인 일은 파리와 모기를 잡은 것과 새우, 낚지, 문어를 끓는 물에 넣어 탕을 해 먹은 일뿐인 것 같습니다. 아참, 아주 어린 시절 개구리를 잡아 죽인 일은 더러 있었네요. 뱀도 있고요. 쥐는 찐득이나 덫을 놓아 잡곤 했네요. 토끼는 제가 잡지는 않았고 다른 형들이 잡은 것은 구워 먹은 일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요.

저는 경찰서에 가서 확인하면 깨끗합니다. 범죄가 저지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종목사 선발 1차 시험에 합격했을 때 하얀 차가 집에 와서 신원조회를 해갔습니다. 장교가 되는 일에 전혀 문젯거리가 없었기에 11년 동안이나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 건너가서 URC교단에 서류를 접수하기 위하여 한국 경찰을 통하여 영문으로 범죄경력을 조회했는데 역시 깨끗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아주 모범적인 시민입니다. 올해 들어서 교통 범칙금 한 번 낸 적 없습니다. 경찰서는 제가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갈 일 외에는 잠시도 들를 일이 없습니다. 이만 하면 괜찮은 목사 아닌가요? 앞으로도 살인을 할 일이 없을 테니 저 같은 사람만 있으면 경찰서나 판검사와 변호사 직업 또한 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저는 정말 이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성경 말씀을 읽으니 아차 싶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물론 제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누구랑 다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라고 하는 말을 쓴 이유는 어쩌다가 벌이는 부부싸움 때문입니다. 물론 지난 3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폭력을 행사한 일은 없습니다. 제 아내에게 꿀밤 한 대 먹인 일도 없습니다. 장난으로도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벌써 우리는 끝장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견 대립으로 인하여 가끔 말다툼을 벌인 일은 있습니다. 물론 끝나고 나면 늘 후회하면서 제가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지만 말입니다.


저도 감정을 가진 사람인지라 속으로 시기 질투하는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아주 미워하는 감정이 생기기도 합니다. TV 뉴스에 나오는 흉악범일 때도 있고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일 때도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정치인들이 우리나라를 향해 벌이는 몰역사적인 언동을 볼 때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곤 합니다. 쪽바리니 일본 놈들이라는 표현도 쓸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바보 멍청이 같으니! 이런 표현을 쓸 때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한참 멀었습니다. 분노와 혈기를 잘 다스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일자: 2024년 11월 6일(수)

제목: 긴 머리 짧은 치마 입는 사람들에게

본문: 마태복음 5장 27~32절

“‘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오른 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공동번역 개정판, 27~29절)


유튜브에 올라온 재미나는 영상들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찍은 것 같습니다. 가끔 아프리카 쪽에서 올린 것 같은 영상들도 있고요.


젊은 연인 한 쌍이 다정하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마도 데이트 중인 것 같습니다. 열심히 대화를 나누며 걷는데 그 옆으로 빼어난 미모를 한 여성이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지나갑니다. 실은 몰래카메라입니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이 여성을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아마도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여친이 남친의 팔을 때리거나 혹은 가슴을 밀치면서 씩씩거리고 가버립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잠시 깨져버렸습니다. 물론 그다음 상황이 언급되지 않아서 영영 헤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서울에서 살 동안 지하철을 이용한 일이 많았습니다. 겨울철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더운 여름철에는 가끔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하곤 했습니다. 늘씬한 몸매를 한 젊은 여성들이 반팔에다가 짧은 반바지나 치마를 입고 들어오면 남자들은 십중팔구 그녀들을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까? 젊은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뻘 되는 중년의 남자들도 그랬고 심지어 할아버지 격인 어르신들도 그녀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아! 여성들은 꽃과 같은가요? 분명히 지식적으로는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눈은 거의 반사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런 조언을 하지요. 그러면 젊은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야! 여름철에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녀? 그러다 큰 일 당할라.”

그러면 젊은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런 말씀 말아요. 제가 시원하라고 입는 건데 무슨 걱정이에요?”

“아냐.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밤거리 조심하고 혹시 뒤따르는 남자들 있으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

“별 걱정 다하시네요. 제가 누구에게 보이려고 이런 옷을 입는 줄 아세요? 너무 더워서 그냥 시원하라고 입는 건데요.”


이런 식의 대화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한 가지 놓치는 일이 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남성들에게는 왠지 모를 감정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성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이 말씀만을 놓고 봐도 예수님은 남성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여성들에게 고유한 정서와 감정이 있듯이 남성들도 그렇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어른도 늘씬하고 예쁜 여성을 보면 눈길을 돌립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음욕일 수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대단히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시기 질투입니다. 간음이라는 결과는 음욕이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견물생심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따라서 볼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자: 2024년 11월 7일(목)

제목: 차라리 안 했으면 좋겠어요

본문: 마태복음 5장 33~37절

<“옛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표준새번역, 33절)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7절)


어제 미국 제47대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45대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46대 바이든 대통령이 죽을 쑤는 바람에 그가 다시 출마하여 당선된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경제 외교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재앙이 될 것이라 전망하는 전문가들이 있더군요.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본래 그는 사업가였습니다. 부동산 재벌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매사를 사업가처럼 처리합니다. 미국에 이익이 되느냐 않느냐. 그것도 가급적 미국의 백인들에게 말이지요. 그는 인종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해외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많은 서러움을 맛보게 됩니다. 유색인종들은 더욱 그러하고요.


미국 대통령들은 대개 성경에 손을 얻고 헌법에 따라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최선을 다해 헌법을 보존 보호 및 수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So help me God.)라며 짧게 기도하는데 이는 헌법사항은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에 손을 얻고 하나님 도와주소서. 그런데 이렇게 엄숙히 기도한 다음 실제적으로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미국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외의 나라들은 한 마디로 죽어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다 망해도 미국만 안전하고 잘 살면 그만인 식입니다. 그는 타국 정상들과 맺은 협정이나 협상도 때에 따라서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상식과 지성을 가진 이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성경과 하등 관계가 없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며 반평화적인 국제정책을 펴는 사람이 성경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러니 성경에 손을 얹고 다짐하는 일은 그저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어떤 선언문을 읽고 잘하겠다고 약속을 할까요?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다수의 대통령들에게 이 또한 취임식 중에 갖는 하나의 행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부정부패로 옥살이를 한 대통령 그리고 무능함과 심각한 불법 때문에 탄핵을 당하여 임기도 마치지 못한 채 역시 투옥된 대통령. 그들도 다 위에 인용한 내용대로 선서를 했습니다. 일종의 맹세이지요. 하지 않은 만 못한 맹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도 마라. 그런데 검사들 세계에도 명문장으로 된 선서가 있더군요.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이대로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자: 2024년 11월 8일(금)

제목: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데요

본문: 마태복음 5장 38~42절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공동번역 개정판, 40~41절)


저는 중고등학생 시절 이른바 범생이어서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뺨을 맞거나 폭행에 가까운 체벌을 당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시험 점수가 조금 떨어졌거나 문제를 말 못 풀어서 손바닥을 몇 대 맞는 일은 가끔 있었습니다. 한 반에 65명이 넘는 남자아이들이 콩나물시루 같이 앉아있는 교실이다 보니 선생님들의 어려움이 보통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체벌이 아니라 폭행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 개인적으로 동의는 하지 않지만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체벌의 종류는 정말 다양했습니다.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맞는 것은 거의 기본이자 애교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이 쳐주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쁘거나 행실이 뭐 같았던 녀석들 일지라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조금 터프했던 선생님들은 그런 것쯤이야 가볍게 넘어서셨습니다. 때리고 밟고, 애들을 잡아먹을 듯이 얼굴을 붉히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해대신 선생님들! 지금 어디서 뭐 하고 계시는지요? 생존해 계시는지요?


사랑의 매라고 하셨고 다 우리들 잘되라고 그러신다 하셨으니 그대로 믿으려 합니다. 그런데 좀 심하지 않으셨나요? 어떤 때는 별로 수업을 하시기 싫은 차에 건수를 잡아 개 패듯 하신 것은 아닌지요? 아님 수업 준비가 안 되어 고민하던 차에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으로 나오자 우리들을 아작 내신 것 아닌지 궁금합니다.


습관적으로 맞고, 의례적으로 얻어터지고, 심심해서 맞고, 졸다 맞고, 몰래 밥 꺼내먹다 맞고, 숙제 안 해 와서 맞고, 성적이 떨어져 맞고, 선생님이 기분 나쁘다고 맞고, 못 생겼다고 맞고, 뚱뚱하다고 맞고, 교과서 안 가져왔다고 맞은 아이들에 따르면 체벌에도 기분 좋은 것이 있고 기분 나쁜 것도 있다더군요. 대부분 아이들은 뺨을 맞을 때 가장 기분이 상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기분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뺨을 맞을 때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챗 GPT에게 물었더니 제가 예상한 것과 유사한 답을 하더군요. 다음은 똘똘한 AI가 한 대답입니다.


1. 신체적 반응: 뺨을 맞으면 순간적으로 통증이 느껴집니다. 피부가 뜨거워지고 욱신거릴 수 있으며, 강도가 세다면 멍이 들거나 부어오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충격에 의해 잠시 동안 어지러움을 느끼거나 균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2. 감정적 반응: 감정적으로는 충격을 받거나,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는다면, 분노나 불안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3. 심리적 영향: 신체적 고통보다도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사실 자체가 심리적으로 불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나 신뢰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행동을 당했다면, 실망감이나 배신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AI도 다 아는 뺨 맞기의 아픈 추억!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주 독특한 말씀을 하셨네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표준새번역, 38~39절)


포악한 로마 군병들에게 함부로 맞서다가는 가루가 될 수 있으니 비폭력무저항으로 나가야 한다. 무저항만이 무자비한 폭력을 근원적으로 끊을 수 있는 길이라는 소리지요.



일자: 2024년 11월 9일(토)

제목: 정말 부담이 되는군요

본문: 마태복음 5장 43~48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표준새번역, 44~45절)


성경을 읽다 보면 한없이 은혜가 되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삶에 지혜와 교훈이 되는 경우도 많고요.


얼마 전 유튜브로 한 예능프로를 보는데 어느 배우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무슨 판소리 후렴처럼 되뇌더군요. 그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다음 구절도 널리 사랑받는 모양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 말씀이 선포된 역사적 배경을 알면 더 좋겠지만 구절 속에 등장하는 ‘미래와 희망’이라는 표현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주목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단어를 좋아합니다. 내일과 미래, 희망 꿈 비전. 나이가 들수록 더욱 품고 다니고 싶은 단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 만해도 마음이 젊어지고 삶에 대한 동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성경에는 꼭 그런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 말씀에 아멘은 해야 하는데 실천은 참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자존심을 건들고, 사람들에게 내 뒷담화를 늘어놓고, 별 잘못이 없는 나를 나쁜 사람 만들고, 내 앞길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내가 아주 치사하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고, 사사건건 내 의견을 묵살해 버리고, 은근히 나를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들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요? 그 사람 때문에 복장이 터지고, 숨이 막히고, 자나 가도 벌떡 일어나곤 하는 데도요?


하나님! 가능하면 저희에게 실천 가능한 말씀을 좀 주십시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입만 열면 강단에서 사랑 사랑 설교하는 유명 목사님들도 정작 강단 아래에서는 때로 고소도 하고 고발도 하며 심지어 저주를 쏟아붓는 경우도 있던데 저같이 무명한 사람이 어떻게 원수를요?


제가 비교적 대인관계가 원만한 편인데 솔직히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해 놓은 분들이 두 세분 있습니다. 아직도 관계를 회복하기가 부담스럽고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그럽니다. 물론 원수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만나기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얼굴을 보면 인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요?


이런 본문으로 설교해야 하는 저 같은 목회자들은 참 곤혹스럽습니다. 어찌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몰라서 그러겠습니까? 그동안 한두 번 설교했겠습니까? 문제는 실천이 쉽지 않다는 점이지요. 목회자만 그럴까요? 성도들도 곤혹스럽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요. 원수를 사랑하라! 참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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