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은 서럽습니다

마태복음 4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0월 30일(수)

제목: 적당히 해야지요

본문: 마태복음 4장 1~11절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공동번역 개정판, 1절)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11절)


사람 속에는 누구에게나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 있지요. 본능을 잘 제어하여야 한다지만 역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사흘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는다고 하잖습니까? 지금 내 배가 부르면 꽃등심이니 안심이니 하는 고기를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더 먹어 더 먹어해도 손사래 칩니다. 문제는 배가 고플 때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기가 지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거나 반대로 악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서지요. 그때는 담장을 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요. 그게 본능이니까요.


악마라는 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협지 속 귀신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본능을 부정적인 쪽으로 자극하거나 극대화시키는 힘입니다. 나아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가지도록 만드는 구조입니다. 극한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악마가 활개 치기 쉽습니다. 없는 사람은 한 방에 무시당합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소리쳐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존재자체를 그야말로 투명인간 취급합니다. 그러니 더 움켜쥐려고 하지요. 더 많이 거머쥐어야 어디를 가도 방귀 좀 뀌는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으니까요.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권력에 맹종하게 만들거나 절대권력 앞에서 비굴해 지기를 요구합니다. 물론 반대도 있습니다. 메시아 의식은 종교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종교 안에서야 지금도 재림 예수, 자칭 메시아, 하나님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잖습니까? 교권이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고개를 숙입니다. 말에 무게가 실립니다.


저 같은 농촌교회 목사는 제 아무리 그럴듯한 설교를 하고 대사회적인 메시지를 내놓아도 사람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형교회의 경우 맹꽁이 소리를 하고 개구리 소리를 해도 뭔가 신령한 말씀이 아닌가 하고 마이크를 들이댑니다. 그러니 악마가 충동질을 마구 해댑니다. 사람들을 더 끌어 모아. 고가품의 해외여행상품을 걸고서라도 교인들 숫자 불리는데 매진을 해. 작은 교회 목사는 동정의 대상일 뿐이야. 네가 주목을 받으려면 힘을 키워야 해. 정치권과도 손을 잡을 필요가 있고 특히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들이받아. 그들은 너를 처벌하지 않을 테니. 그런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몰려들 거야. 네가 진짜 목사라고 하면서. 힘이 깡패야!


악마는 우리 눈이 획 돌아가도록 충동질합니다. 과도한 욕망과 탐욕에 젖어들도록 말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적당히 먹으면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활력을 느끼도록 합니다. 하지만 과하게 섭취하면 그야말로 독이 됩니다. 약이냐 독이냐. 그것은 음식을 대해는 우리들의 태도에도 크게 달렸습니다. 과유불급 아니겠습니까?


가난하기보다는 여유로운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주가조작을 한다거나 고속도로를 휘게 하여 자신이 가진 땅값이 폭등하도록 만드는 일은 분명히 독입니다. 그렇게 공룡같이 돈을 먹고 또 먹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자신을 찌릅니다. 과도한 욕망은 자신의 목을 조입니다. 머지않아 찔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해야 합니다.



일자: 2024년 10월 31일(목)

제목: 변방은 서럽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4장 12~17절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표준새번역, 14~16절)


저는 군종목사로 사역할 때 아주 변방은 아니지만 변방 인근에서 근무한 적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변방에서 근무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명령이 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전방은 아니지만 거의 전방 또는 후방 지역에서는 최고로 변방 같은 곳에서 열심히 근무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변방에 근처에 있다 보니 소외감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우선, 가끔씩 맛있는 것을 좀 사 먹고 싶어도 살 곳이 마땅치 않아서 불편했습니다. 생각만 하고 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는 옷은 나날이 허름해졌고 세탁하는 일도 단념하는 경우가 늘어갔습니다. 해가 지면 왜 그리 캄캄하던 지요.


아이들 교육 수준도 문제였습니다. 과외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학습지 선생님은 척 봐도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 다녀온 제 아이는 자기네 반 아이들이 학교 선생님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며 분통을 터뜨리더군요. 겨우 4학년이었는데요. 몇 명 되지도 않는 반 애들이 개구 졌으면 얼마나 그랬다고 뺨을 때려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가 서울 강남이고 우리가 판검사였더라도 그랬을까?


서럽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극장이 있나 연극을 볼 수가 있나. 음악회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문화적인 혜택을 누릴 수 없으니 날이 갈수록 미개인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 보낼 학원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애들과 부대 연병장에서 공은 실컷 찰 수 있었습니다. 한 겨울밤 10시 갑자기 폭설이 내렸을 때 두 아들을 연병장으로 데리고 나가 뛰어놀았습니다. 병사들은 다 취침 중이었는데 우리는 좋다고 공도 차고 씨름도 했지요. 저희 관사가 부대 안 연병장에 붙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가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또는 조선시대 변방 이야기를 책에서 읽곤 합니다. 제가 부대에서 경험했던 변방 근처 생활은 아예 명함도 내밀 생각을 못할 지경이었더군요.


챗 GPT에게 조선시대 대표적 변방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니 이렇게 답을 내놓았습니다.


<조선시대 변방 지역과 소외>

함경도와 평안도: 조선 초기부터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은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기 어려운 변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은 이 지역 사람들을 “별감”이라 부르며 관직을 제한하고 차별을 두었는데, 이는 중앙과의 정치적, 사회적 단절을 야기했습니다.


제주도: 본토와 지리적으로 분리된 제주도는 중앙의 직접적인 관리가 어려웠으며, 역모나 유배지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농업 조건도 열악하고 교통과 소통에서도 차별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대표적인 변방, 곧 소외된 곳, 빼앗긴 곳, 억눌린 곳, 무시당한 곳, 짓밟힌 곳이 바로 스불론과 납달리가 있던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북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또는 애굽과 전쟁을 치러야 할 때 그곳을 통과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곳은 문학적으로 어둠의 땅이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절망의 땅이요 고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곳에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일상을 둘러싼 온갖 혜택이 몰려있었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말입니다.



일자: 2024년 11월 1일(금)

제목: 사방에 내리신 은혜

본문: 마태복음 4장 18~25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표준새번역, 23~24절)


“목사님! 저 내일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네, 제 아내가 입원을 했습니다.”

“무슨 일로요? 심각한 것인가요?”

“네, 대장암 2기라는 판정이 나서 항암 치료받으러 왔어요.”

“그러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기도할 테니 힘내세요.”


대부분 성도님들 연세가 많으시니 갈수록 편찮으신 분들이 늘어나는군요. 여러 어르신들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시고 일반병원을 오가시는 일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고관절이 편찮으신 분, 다리가 아프신 분, 허리 한 번 펴는 것이 소원이신 분, 귀가 잘 들리시지 않는 분... 불편한 사항과 병명을 쓰자면 날이 샐 것 같습니다.


제가 5년 전 부임했을 때만 해도 생생하셨던 어르신들 중에 이미 우리 곁을 떠나신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그리고 기력이 쇠하여 교회출석이 어려운 분들도 여러 분 계시고요. 자녀들이 타지로 아예 모시고 간 어르신도 세 분이나 되네요. 그런 분들 뵐 때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이런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주님! 제게 신유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각종 질병을 고칠 수 있게 은혜를 내리소서.’


병 때문에 힘겨워하시거나 낙심한 성도들 얼굴이 눈에 어른거릴 때면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런 기도를 드린 지가 제법 되었는데 제 마음에 늘 스쳐가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방에 전문병원들을 주지 않았냐. 세계가 부러워하는 첨단 의료시설과 뛰어난 의사들 그리고 수준급 체계를 갖추게 하지 않았니. 더 중요한 기도제목은 미국처럼 의료민영화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 아니겠어? 곳곳에 약국들을 주었고 병원들도 즐비하니 환자들이 부담 없이 병원을 오가며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길 바란다.’


저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온갖 병을 고치는 치유사역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 여러 나라들 중에 의료기관이 현저히 부족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지간히 아파도 병원은커녕 약국조차 가기 어려운 지역이 좀 많습니까?


지금부터 약 5~60여 년 전 제 고향마을에서도 약국이 없었습니다. 아니 열 살이 되기까지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병원이라는 것도 교과서에서나 보았습니다. 간호사님은 어쩌다 학교에서 무료로 주사를 놔줄 때 본 것 같습니다. 의사라는 단어도 교과서에서 익힌 것 같고요. 이 모든 것들은 부산으로 이사를 간 후 초등학교 4학년 때나 되어 처음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 의료시설은 기대나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셔야만 했겠지요. 물론 이적을 베푸신 동기는 측은지심이었고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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