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니 알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7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1월 17일(주일)

제목: 조심합시다

본문: 마태복음 7장 1~6절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신 본문 말씀의 시작입니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개정개역에서는 비판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심판이든 비판이든 모두 나 아닌 다른 이들의 허물, 실수, 잘못, 약점, 어둔 면, 성격적 결함, 경력, 이력, 가정상황, 자녀문제, 병역, 논문, 학위, 업적, 학력 등 다양한 측면에 다하여 문제점을 찾아내어 이의를 제기하거나 심한 경우 공론화시키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따지고 비난하는 일을 포함한다 하겠습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공격을 감행할 때 우리는 때로 엄청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보노라면 우월감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쩔 줄 몰라하거나 눈물 쏟는 모습을 본다면 희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납작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빌기라도 하면 어떤 심정이 될까요? 내가 마치 정의의 사도 심지어 하나님이 된 것 같은 성취감을 얻게 되지는 않을까요?


저는 신학대학 재학시절 학보사 취재부장을 역임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삼아 들어가 3년 동안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생활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길러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비판정신입니다. 지금은 유명한 일간지나 방송국 기자들을 향하여 기레기라는 비난을 쏟아붓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이른바 ‘기자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자 정신이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가능한 객관적인 사실에 접근하여 취재를 한 후 정확하게 분석하고 비판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자 정신에서 생명처럼 소중한 한 가지 요소는 바로 비판정신입니다.


제가 나온 신학대학신문이야 한 달에 한 번 발행했으니 그저 아마추어 기자였지요. 하지만 기자정신이라는 단어는 수시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자라는 사실에 나름 자부심이 강했고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선후배 동기들이 ‘신 기자님’하고 불러주면 얼마나 우쭐해졌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때 제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추억을 떠올릴 겸 저를 그렇게 부르곤 합니다.


젊은 시절 나름 비판정신이 있었는데 어느덧 회갑을 맞고 보니 가끔씩 놀랍기도 하고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문제를 삼았고 비판을 했던 대상과 별 차이가 없는 생각과 말과 삶을 보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왜 저러셔?’ 했는데 어느덧 제가 그런 목회자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곤 하는데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아! 나름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셨구나.’ 친히 겪어보니 이해가 가는 측면이 적지 않군요. 젊다는 이유로 비판을 가하곤 했는데 피장파장이 되고 보니 때로 적지 않게 부끄럽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문제는 내게 남들보다 더 많은 허물과 약점과 부족한 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시하지 못한 채 남이 가진 작은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과도하게 마음을 쏟으려 하니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일자: 2024년 11월 18일(월)

제목: 겪어보니 알 것 같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7장 7~11절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표준새번역, 9~11절)

저는 이런 성경말씀을 읽을 때마다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목회하기를 참 잘했다 싶습니다. 그와 동시에 결혼해 본 적이 없는 신부와 승려들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런 것을 독서나 머리로써가 아니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할 수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얼마 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 강 작가가 쓴 <소년이 온다>에 이어 지금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인선 씨는 목공 작업을 하다가 전기톱에 손가락을 두 개나 잘려서 봉합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1부 <새>에 나오는 2장 <실>에서 절감할 수 있습니다. 인선 씨는 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을 면회온 친구 인선 씨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물론 직접 경험해 본 것만이 모든 진리 혹은 진실의 척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하는 남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남편은 그것을 치통 정도로 생각했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해산고통을 치통 정도로 여기다니요. 그게 다 겪어보지 못해서 하는 막말 아니겠습니까?


인선 씨도 그전에는 당연히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잘린 손가락 봉합수술을 받은 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4.3 제주 항쟁 때 비운의 죽음을 당한 이들이 겪은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실연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연인 간에 벌어지는 이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머리로나 독서를 통해서 하는 이해 말고요.


저는 결혼하기 전 이별의 아픔을 겪어 보았습니다. 그 후 소설이나 잡지 속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심정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토록 큰 아픔을 주었던 연인과 재회하여 결혼함으로써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희열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한 지 어언 만 36년이 지났습니다.


두 아들을 낳고 기르기 전까지 본문 말씀은 그저 상상 속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부터 공감할 수 있습니다. 동두천에 있는 아들이 저보다 수백 배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얼마나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캐나다에서 직장 생활하는 둘째가 정말 좋은 신앙인이 되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혹시 누가 몸이 불편하다고 하면 차라리 제가 드러누웠으면 하게 되더군요.


요즈음은 가슴으로 낳은 딸인 며느리가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을 운영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이들이 이제는 제 일처럼 되어서 때로는 가슴 졸이고 또 때로는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며느리가 무조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며느리를 얻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제는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참 감사합니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일자: 2024년 11월 19일(화)

제목: 마귀를 보고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7장 12~20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공동번역 개정판, 17~18절)

저는 가능한 사람을 좋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날 때부터 나쁜 사람, 악당, 구제불능, 살인마와 같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출생 이후 그가 처한 상황 때문에 이런 길을 걷기도 하고 또 저런 길을 걷게 되고요. 애기들은 다 천사 같습니다. 사람만 그런가요? 호랑이도 사자도 살쾡이도 새끼들은 다 예쁘지 않나요?


문제는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형편없고 어이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역사를 새롭게 할 만한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여건에 압도당하거나 지배당하는 것 같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했지 않습니까? 제 인생도 교회라는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면서부터 예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존재로 빚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열매로 고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평범한 목회자들은 대체로 선한 성도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아무리 악한 교인이라고 해도 교회 밖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분들은 거의 매일 새벽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십니다. 다수의 성도들은 수요일과 주일에 그렇게 합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거짓되게 사십시오. 사기 치며 사십시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저주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서서히 언어가 바뀌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실이 변화되며,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의 현저한 변화를 겪는 분들도 심심찮게 보아왔습니다. 그야말로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목회자가 맛볼 수 있는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아! 저분은 눈빛이 달라지고 있네. 오! 저 사람은 얼굴 표정이 바뀌고 있어. 살벌했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온유함과 친절함이 봄에 꽃피듯 돋아나고 있네. 이런 변화를 겪는 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 사람이 바뀌는구나. 사람은 잘 안 바뀐다던데 꼭 그렇지도 않구나. 저는 목회하면서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목사가 된 것에 커다란 만족감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 특히 현실정치인들이 벌이는 일들을 접할 때는 사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아! 우리 주변에 사악한 인간들이 있구나. 양심과는 전혀 무관한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있구나. 은혜를 모르고 감사를 모르며 인간의 기본 도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인면수심! 정말 있네요.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짐승이요 마귀이며 귀신들입니다. 정말 있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목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런 것들을 평가하게 되냐고요? 삶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태도입니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회와 국가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한국에 마귀가 분명히 있습니다. 장차 무저갱에 넣어야 할 쭉정이들이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150%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천사 같은 이들도 있고 대왕마귀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굴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일자: 2024년 11월 20일(수)

제목: 시키는 대로 했어요

본문: 마태복음 7장 21~29절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표준새번역, 24~25절)

“이제 더 이상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른 외진 환자분들이 몇 달씩 밀려 있기도 해서 그러니 그분들에게 양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완전히 나은 것이니 혹시 재발했다면 몰라도 더 이상 오지 마세요. 일정 잡아드리지 않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세요.”


몇 년 만인가요? 물론 벌써 약을 뗀 지는 제법 되었지만 완전히 나았다는 선언을 들으니 아내가 얼마나 감격하던 지요!


아내는 지금으로부터 약 4년여 전쯤 고혈압 당뇨 고지혈 뇌경색 진단을 받고는 두 주 연속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가 결혼을 한 후 처음 맛보는 충격이었습니다. 중환자실까지 들어가 치료를 받는 바람에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혼란과 충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아내는 퇴원 즉시 의사 선생님들이 말한 바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아내는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고 그 모든 질병을 반드시 극복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저도 몸을 잘 못 관리하면 언제든지 유사한 일을 겪을 수도 있으니 식단을 짜는 일부터 생활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가벼운 뇌경색 증상은 완전치유는 불가능하니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예방을 하고, 나머지 고혈압과 당뇨는 노력여하에 따라 극복이 가능하다고 하니 꼭 물리치리라!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에 가득했던 라면과 국수부터 다 치워버렸습니다. 아니 싹 다 내다 버렸습니다. 제가 그토록 좋아했던 비빔국수를 다시는 집에서 먹지 않게 된 것입니다. 쌀은 잡곡으로 바꾸고 콩을 많이 넣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맵고 달고 짠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저희 내외는 단백질 섭취를 위해 쇠고기를 가끔씩 먹은 것 외에 육식은 거의 중단했습니다. 대신 신선한 농산물과 과일을 자주 섭취했고 샐러드를 풍성하게 먹으려 노력했습니다. 아재는 흰 쌀 밥은 전혀 먹지 않습니다. 저는 환자가 아니라서 상황에 따라 적당히 먹었습니다.


아내는 병원 의사들이나 유튜브에서 건강 관련 강의를 하는 분들의 정보를 생명처럼 여기고 그대로 순종하며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한 번 결심하면 무섭게 행동에 옮기는 면이 있는 조금 ‘무서운’ 아내입니다.


제 기억에 1년 조금 지나면서 혈압과 당뇨에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주치의가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몸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느냐고 오히려 되물었습니다. 아내는 초지일관 대답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했는데요!” 나중에는 그 교수님이 아내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시킨 대로 잘 따라줘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환자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는 의사들도 맥이 빠진다고 하시더군요.


아내는 지난 4년 간 거의 흐트러짐 없이 몸을 관리해 왔습니다. 저는 환자가 아니기에 적당히 반칙도 하며 지내왔지만 아내의 사전에 반칙이란 단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든 건강생활이든 배우고 듣고 가르침을 받는 대로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승리하는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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