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사람이었군요

마태복음 8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1월 21일(목)

제목: 싫으면 그만둬

본문: 마태복음 8장 1~4절

<그때에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공동번역 개정판, 2~3절)

“자! 먹어라.”

“싫어요. 먹기 싫어요.”

“그러지 말고 먹어. 엄마가 네 생각해서 만든 건데. 맛있으니 먹어.”

“에이, 안 먹어요. 먹기 싫어요.”


저희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끔 이런 옥신각신 대화가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서 있곤 했습니다. 아내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 신경을 써서 음식을 만들었지만 아이들은 때로 별 관심이 없더군요. 아내는 무척 속상해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한 마디 했지요.


“싫다는데 자꾸 왜 그래? 나 줘. 나 먹게.”


그리고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표정으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이없다는 듯 저를 바라보았고 아내는 제가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에 오뉴월에 눈 녹듯 서운함이 쉬 사라졌습니다. 싫다는 놈들을 어떡하겠습니까? 먹겠다는 사람에게 주면 되지요.


물론 우리 신앙이 이런 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무관한 일도 아닙니다. 성경 전반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 대단히 적극적이며 능동적이고 진취적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태도도 그럴 것이라 여겨집니다.


한센병은 예수님 당시에는 거의 불치의 병이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환자의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증상이 심한 경우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는데 그럴 때면 환자의 마음속에는 좌절 절망 소외 고독 원망 공포 죽음 같은 단어들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다 보면 그런 정서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퇴원을 앞두고 있는 분들은 생기가 돕니다. 그날이 오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모릅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구나. TV드라마도 볼 수 있고 극장에도 갈 수 있겠구나. 맛있는 피자도 사 먹고 햄버거도 먹어야지. 친구들과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밀린 이야기를 나눠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 벌써 살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다녀오면 제 자신부터 한 동안 의욕이 떨어집니다. 살았으나 산 것 같지 않은 그분들의 생기 잃은 눈빛과 윤기 잃은 피부, 힘과 의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거기다 치매까지 걸려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른들을 뵙기라도 하면 마음이 급속도로 우울해집니다.


한센 병자는 삶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치료받고 회복하여 온전하게 살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강렬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인데 보람과 가치와 행복과 만족을 느끼며 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이 질병만 떨쳐낼 수 있다면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의욕이 그 사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싫으면 그만둬. 싫다는 사람 어떡합니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지요.



일자: 2024년 11월 22일(금)

제목: 참 좋은 사람이었군요

본문: 마태복음 8장 5~13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 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기를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표준새번역, 5~6절)

이 백부장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는 그야말로 탁월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표정을 카메라에 담거나 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흥미로울까요?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오셨더라면 유튜브로 다 찍어 올려 전 세계인들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아무튼.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공동번역 개정판, 10절b)


최고야 최고! 이런 의미 아니겠어요? 예수님께서 핸드폰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체리 따봉을 이모티콘을 수십 개는 더 날리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마음을 이처럼 격하게 감동시킨 백부장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각도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저는 백부장의 인간됨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로마제국 소속 장교였습니다. 장교요 지휘관이면 국가를 막론하고 엘리트 의식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야 식민통치를 위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참고로, ROTC(학생군사교육단)를 운용하는 동국대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후보생 신조>와 <장교의 책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가만히 음미해 보면 장교라는 신분과 수행해야 하는 직책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엘리트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후보생 신조> 하나, 우리는 조국수호와 민족번영을 위하여 젊음을 바친다. 하나, 우리는 장교 후보생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항상 솔선수범한다. 하나, 우리는 올바른 가치관 형성과 전기전술 연마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장교의 책무> 장교는 군대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장교는 그 책임의 중대함을 자각하여 직무수행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건전한 인격의 도야와 심신의 수련에 힘쓸 것이며, 처사를 공명정대히 하고 법규를 준수하며,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 역경에 처하여서도 올바른 판단과 조치를 할 수 있는 통찰력과 권위를 갖춰야 한다.


저는 군종장교로 임관했습니다. 벌써 34년 전 일입니다. 그때는 아주 젊은 때라서 군종목사였음에도 장교라는 의식이 제법 있었습니다.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8주간 장교훈련을 받고 이어 4주간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는 동안 조금씩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대에 배치를 받은 후부터 ‘아! 나는 장교지? 병사들과 부사관들과는 다른 군인이지.’라는 의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백부장은 그냥 장교가 아니라 대로마 제국 소속으로 식민통치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에 와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뼛속까지 우월의식 선민의식 엘리트의식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중풍병에 걸린 하인 정도야 거들떠보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벽을 깨고 넘어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간구했습니다. ‘제발 제 하인을 좀 고쳐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인격 그리고 존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하인을 긍휼히 여기고 연민의 정을 느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다른 말로 공감능력이 컸습니다. 로마 장교이기 이전에 겸손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일자: 2024년 11월 23일(토)

제목: 아프면 엄청 괴롭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8장 14~17절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표준새번역, 16~17절)

“목사님! 저는 우리 남편만 아픈 줄 알았는데 병원에 가보니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요. 아픈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요.”

최근에 병원에 다녀오신 어느 권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더 입원해 있어야 하는데 오늘 그냥 퇴원했어요. 엊그제 환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정신이상 자라요. 그런데 그가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이틀간 밤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다른 병실로 옮겨달라고 했는데 자리가 없다고 해서 그냥 퇴원해 버렸어요.”


이는 또 다른 성도님께서 하신 말입니다.


어르신들이 많은 지방병원들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갈 때마다 병원이 아니라 마치 재래식 시장 같은 느낌이 듭니다. 주차장부터 얼마나 복잡한지 어떨 때는 솔직히 병원 가기가 두렵습니다. 특히 논산에 있는 유일한 종합병원은 주차장 시설이 너무 낙후되어 내가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나 싶습니다. 그 엄청난 환자들 다 받아놓고 시설 투자는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느 넓은 한 공간에는 완전 비포장에다 움푹 팬 곳이 마치 협곡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암튼 웬만한 병원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을 보면서 왜 이리 아픈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옛날 같으면 그냥 아프고 말 병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으니 그럴 것이고요. 또 어느 때보다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 병원 가는 일이 일상화된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겠지요. 무엇보다도 평균수명이 현저히 늘어나면서 병원신세를 지는 어르신들이 많아진 탓도 있을 것이고요. 다행히도 아직은 의료체계가 완전붕괴 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환자들이 넘치는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침탈을 받고 있던 약소국 이스라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사람이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일들이 한 두 가지였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에서는 귀신 들렸다고 하는 정신이상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이나 약국이 있었겠습니까? 대부분 민간요법으로 치료했겠지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픈 곳에 된장 바르고, 벌에 물리면 이 똥 바르고, 툭하면 빨간약 바르는 식이 었겠지요. 아! 그런 것들도 귀했을 수 있겠네요.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축사나 치병의 능력이 나온다는 소문이 어찌 삽시간에 퍼지지 않았겠습니까!


신학생 시절 몹시 배가 고플 때는 분식집 아주머니가 장모였으면 했습니다. 맛있는 통닭이 간절할 때는 그런 가게에 데릴사위라도 들어갔으면 했고요. 지갑이 늘 비어 있을 때는 부잣집에 장가들었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요즈음은요? 전화 한 통이면 즉시 응급실이나 병실에 들어갈 수 있는 줄 될 만한 의사나 병원 직원을 알고 지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나 지인들 가운데 긴급환자가 생기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고 번민 가득한 상황이면 천국이니 영생이니 하는 고차원의 문제를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싶은 것이 연약한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일자: 2024년 11월 24일(주일)

제목: 예외가 있겠습니까?

본문: 마태복음 8장 18~22절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표준새번역, 19~20절)

예수님께서 한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을 곱씹어보면 가슴이 짠해집니다. 한 가지 이유는 2천 년 전 당시 우리 주님께서 처하셨던 상황이 그려져서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당신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고 운명을 걸었던 이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니까요. 호기심에 그분을 따른 이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고, 칼날 같은 비난과 피난을 쏟아부으려 호시탐탐 노린 일들도 적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미 직감하고 계셨잖습니까? 공생애 동안 펼쳐온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속한다면 기다리는 것은 참혹한 십자가 처형이라는 것 말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중에서 여전히 주님을 자신들의 삶의 발판, 출세를 향한 사다리로 여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툭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크냐? 이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거나 다투는 일도 있었잖습니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면 예수님께 인사 청탁도 마다하지 않았고요. ‘우리 두 아들 잘 부탁합니다. 한 자리씩 챙겨주세요.’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를 이용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참담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목회자 지망생 수가 예전에 비해 현저히 적어지고 있답니다. 정규 신학대학 신학과 지원자 수가 매년 미달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고 목사 안수자도 그렇고요. 이렇게 가다가는 10년 내로 폐교될 정규 신학대학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제가 소속된 교단신학대학교도 예외가 아니고요. 지방에 위치한 중소형 교회들의 경우 수년이 지나면 담임 목회자 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부교역자들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대전 이하는 내려오지 않으려는 풍토도 있고요.


제가 신학대학에 들어갔던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머지않아 기독교 국가가 될 것 같아!’ 이런 대화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신교 쇠퇴속도가 세계역사에 남을 만큼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장속도도 기록적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채운교회에 부임한 지 한 달 후면 만 5년이 되는데 그동안 돌아가셨거나 노환으로 출석이 어려운 분들을 합치면 거의 20명가량 됩니다. 하지만 채운면 전체의 출산율은 거의 0%에 가깝고요. 이런 추세라면 제가 은퇴할 즈음엔 어떤 상태일까 심히 걱정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백을 하셨지만 저희 세대와 이후로도 한 동안 목회자가 되면 일종의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대형교회, 고급 승용차, 넓은 사택, 높은 연봉, 해외선교여행, 교계 언론과 인터뷰,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들과 교제, 국가조찬기도회, 기독교 잡지 표지모델, 대형집회 강사 등. 어린 신학도들이 흔히 꿈꾸던 희망찬 미래였습니다. 이제부터 서서히 본색이 드러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성공의 길로 걸을 것인가!


한국 기독교는 예외일 줄 알았지만 이미 2천 년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외로움과 고독을 잊는 나라의 교회에게 예외는 없다!



일자: 2024년 11월 25일(월)

제목: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본문: 마태복음 8장 23~27절

<그때 마침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곁에 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공동번역 개정판, 24~25절)

오늘 뉴스를 보니 배우 정우성 씨가 아버지가 되었다더군요. 산모는 결혼을 한 상대는 아니고요.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충실하게 지겠지만 앞으로도 결혼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사생활이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제가 연예인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저는 지금 그 신생아를 생각해 봅니다. 그 아기는 장차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이 세상이 얼마나 험난한지 짐작이나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 불어 닥치곤 하는 위기와 시련의 강도와 빈도가 어떠한지 추측이나 할까요? 만약 출생여부를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면 이런 내막을 알고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저부터도 2~3세 시절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다섯 살 때 일은요? 기억나지 않는데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세상에서 왜 이리 눈물 흘릴 일이 많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즐비한지 저는 어린 시절에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실은 요즘 들어서 비로소 점점 더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스로 깨친 것은 아니고 사회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전문지식과 경험을 두루 지닌 유능한 분들을 통해서입니다.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정말 복잡하네요. 갈수록 더할 것이고요. 맞물려 있는 이해관계는 또한 어떠합니까? 첨예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대립하고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식입니다. 아니, 저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나는 살아야지. 이런 심보로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그때 마침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물론 갈릴리 호수가 가진 지형적인 원인들로 인하여 빈번하게 일어나곤 하는 일이지만 예수님 일행이 항해를 막 시작한 시점에서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조짐이 보였더라면 노를 짓거나 돛을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싱크 홀이 예상되는데 그 도로 위를 걸어가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보았다면 우산을 준비하거나 비옷을 챙기는 법입니다. 그도 아니면 마음으로 단단히 채비를 할 것이고요.


이 세상에 예상 가능한 일들이 많고 쉽게 피할 수 있는 사안들이 가득하다면 얼마나 살기 좋을까요? 암 걸릴 일도 적을 테도 병원 갈 일도 현저히 줄어들겠지요? 모두들 놀랍고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스러워서 발생하곤 하는 질병인데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문제는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도 예기치 않은 일이 예외가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친 파도, 노한 풍랑, 광풍(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이 우리 기독교인들만 비켜간다면 순직자는 왜 생겨나며 순교자는 또 왜 발생하겠습니까? 마치 하나님께서는 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은 일상이 지속되기도 하잖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가서 소화제도 사고, 우황청심환도 먹고, 상담도 받고 하잖습니까?


그래도 감사합니다. 크고 작은 삶의 문제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척척 당장 해결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음 말입니다. 때로는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일자: 2024년 11월 26일(화)

제목: 제정신이 들게 하소서

본문: 마태복음 8장 28~34절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에 가셨을 때에, 귀신 들린 사람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와 마주쳤다. 그들이 너무나 사나웠으므로,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표준새번역, 28~29절)

저 사람 제정신이 아냐.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 되겠어. 아무쪼록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큰일이네. 아무리 힘들어도 정신 바짝 차려. 저분 정신 나갔나 봐 왜 저렇게 말하지? 아무쪼록 정신이 온전해야 할 텐데.


흔하지 않게 듣곤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쓰입니다. 혼이 나갔나 봐. 이 같은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며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우선 정신병동에 그럴 것이고 치매에 걸린 분들도 그렇습니다.


치매라는 질병. 참 안타깝고 또 무섭더군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신데 어느 때부턴가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심해지면 더 이상 아니신 것 같아집니다. 아들을 보고 누구세요 합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딸을 향해 죄송한데 우리 딸 언제 와요 합니다. 아들이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딸이 땅을 치며 통곡을 해도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존재 같습니다.


방금 식사를 바쳤는데 왜 밥을 안 주냐며 타박을 하니 며느리는 속이 뒤집어집니다. 조금 전에 드셨잖아요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를 굶겨 죽이려 드냐며 울기 시작합니다. 며느리는 애간장이 탑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찬송하며 기도했던 분이 갑자기 그러십니다. 누구세요? 권사님, 저 모르시겠어요? 신목사입니다. 목사요? 목사가 뭐예요? 권사님, 저 전혀 기억이 안 나세요?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며칠 뒤 또 심방을 가면 목사님, 어서 오세요 하고 반기십니다. 권사님, 오늘은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그럼요, 제가 어떻게 우리 목사님을 몰라보겠어요. 제가 목사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러셨던 분이 며칠 뒤 찾아가면 또 누구세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참 답답해지더군요.


며칠 전 유튜브에서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전직 미군 병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청했습니다.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이나 고문, 자연재해, 큰 교통사고 등 심각한 사건을 겪은 뒤 여기서 체험한 공포감이 계속 이어지면서 고통스러운 상태를 겪게 되는 질환’이라고 하는군요.


아무튼 전투현장에서 군인은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기 쉽습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전우가 총격을 당해 쓰러질 때 받는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한 자신이 던진 수류탄에 적군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본 일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겨내겠습니까? 그래서 귀가 후 술과 마약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려 몸부림을 치거나 심한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정신 나간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극단적인 경우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이웃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말입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말의 현대적인 표현은 결국 정신질환 아니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뇌신경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현상 말입니다. 다른 신체나 장기는 다 멀쩡한데 뇌를 다치거나 충격이 가해져서 벌어지는 일은 생각만 해도 안타깝고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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