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4년 11월 27일(수)
제목: 누가 뭐래도 사람이 먼저지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대에 누인 채,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기운을 내라,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율법학자 몇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표준새번역, 2~3절)
요즘 귀에 피가 나도록 듣는 말이 있습니다. 법과 원칙대로! 주로 검사들에게서 듣게 됩니다. 물론 TV 뉴스를 통해서이지요. 제가 검사를 만날 일이 뭐 있겠습니까? 판사들도 그런 말을 하고 변호사들도 그런 경우가 있더군요. 모두 소위 말하는 법조인들입니다.
법과 원칙! 비교적 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저로서는 그런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말로는 약속이고 규칙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약속을 잘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교통법규를 비교적 잘 지키는 편이고요.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경찰서에 간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법과 원칙! 모두들 잘 지킨다면 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경찰서, 검찰청, 법원, 법무법인 이런 것들 다 필요 없겠지요. 하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실수도 하고 잘 못도 저지릅니다. 그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허물이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테지요. 천사라면 모를까.
그런데 저는 법과 원칙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것이 때로 흉기가 되기 때문이지요. 무슨 흉기냐고요?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집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억지로 옭아매거나 괴롭히는 일들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상당수 검사들은 시민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긴답니다. 하기야 경찰들도 어디를 가면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지요? 혹시 무슨 나쁜 짓을 하고 있지 않나 살피게 된답니다. 직업이 그래서겠지요.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판사나 검사, 특히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특히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사들의 경우 자신들은 법과 원칙에서 예외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처벌받은 검사는 극히 적다고 하더군요. 웬만한 법을 어겨도 이리저리 빠져나가고요. 검사동일체 원리에 따라 우리가 남인가? 하면서 서로 봐주고 덮어주고 모른 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법과 원칙은 검사들이 아닌 사람들을 징벌하는 데 사용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도 별 차이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법과 원칙이라지만 사람보다 앞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습니까? 사람을 살리고, 사람답게 살게 하고, 공동체가 더욱 살맛 나는 세상이 되도록 도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서비스 업종이 바로 법률계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세상 법이든지 종교법이든지요.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 먼저요 사람 중심으로 일하셨습니다. 그것도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설교하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법과 원칙보다 사람의 가치와 목숨과 행복을 최고로 여기셨습니다. 단 한 번도 법과 원칙이라는 흉기를 휘두르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사회적으로 버림받거나 차별받지 않도록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셨습니다. 단 한 차례도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그런 일을 저지르신 일도 없지만) 덮거나 합리화하려고 법을 이용하신 일도 없었습니다.
일자: 2024년 11월 28일(목)
제목: 저는 계속 아쉬울 것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9장 9~13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공동번역 개정판, 12~13절)
저는 젊은 시절 꽤 긴 세월 동안 의사를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의사 귀한 줄을 잘 몰랐습니다. 나하고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냥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해서 의대를 들어갔을 테고 마침내 의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살면서 고위층 인사로 어깨 힘 좀 주면서 사는 사람들. 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의사 귀한 줄 알게 된 계기는 제 치아에 풍치가 생기면서였습니다.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치과를 드나들면서부터는 의사가 하늘 같은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선생님이라 부르는구나 싶더군요. 틀니와 브리지에 이어 임플란트까지 10년 세월은 걸린 것 같습니다. 이젠 온전한 제 치아는 8개 정도뿐이고 전부 의사 선생님들의 손을 빌려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맛있는 것도 잘 먹고 있고 모임에도 큰 부담 없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 고마운 치과의사 선생님들.
2년여 전에는 중이염 수술을 하느라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약 50년 남짓 방치한 덕분에 제 한쪽 귀는 고막이 사라져 버렸고 청력 또한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군종장교시험에도 합격하여 11년간 군 생활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겠다 싶어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생애 최초로 경험한 전신마취와 함께 4시간에 걸친 수술. 제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죽음과 삶에 대하여 조금 더 진지하고도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공고막을 재생함으로써 청력도 조금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귀앓이를 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물론 계속 조심해야겠지만 바다수영도 조금 즐겨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물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오! 고마우신 의사 선생님.
요즘 만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은 전립선 비대증 때문에 비뇨기과 교수님입니다. 참 친절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TV를 보면 어딘가 거만하고 권위주의적인 분들이 가끔씩 나오는데 저를 만나주시는 분은 수줍음을 타시는 것 같습니다. 얌전하시고 조용하신 국립대학병원교수님. 3개월에 한 번 뵐 때마다 본인의 선친께서도 같은 치료를 받으셨다며 흔한 증상이니 너무 걱정 말라 십니다. 앞으로 1년에 한 번 암 검사도 실시할 텐데 현재까지는 전혀 그런 증상이 없다며 또 안심을 시켜주곤 하십니다. 참 고마우신 의사 선생님.
그렇군요. 의사는 병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의사에게 선생님 하면서 굽실거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 같은 환자들이나 그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펼치신 말씀이 있네요.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고귀하다고, 잘났다고,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예수님을 찾을 필요가 없겠군요. 아쉬울 것이 많은 이들은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려 들 것이고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시 62:1) 저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아쉬울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저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일자: 2024년 11월 29일(금)
제목: 일상적이니 않으셨을까요?
본문: 마태복음 9장 14~17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표준 새 번역, 14~15절)
결혼식! 생각만 해도 즐겁습니다. 제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갈수록 결혼식과는 멀어지는 것 같은 목회환경 때문이지요. 통영에서 목회할 때는 그래도 여러 차례 결혼식 주례를 맡거나 예배기도를 담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채운에 온 뒤로는 장례식 비중은 점점 커지는데 비하여 결혼식 주례는 부임 후 지난 5년간 꼭 한 차례 했네요. 아! 주례자 없는 결혼식에 하객으로 간 적도 두어 차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 제일 기억에 남는 결혼식은 아무래도 제 큰 아들이 장가갔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 친구 목사들 자제들 여럿이 결혼했을 때도 뜻깊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랑의 아버지로서 참석한 것은 제 일생일대에 처음 있는 일이라서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둘째 아들 혼례식이 있다면 그때는 조금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임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 아들과 며느리가 보내준 결혼식 사진첩과 동영상 여러 편을 보니 그날의 감격이 또렷이 회상되더군요. 저와 아내 그리고 신랑과 신부를 보러 온 하객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입가에 만면의 미소를 띠고 오셨더군요. 그야말로 함박웃음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유도한 일도 아닌데도 마치 세상의 행복을 다 차지한 사람들 마냥 활짝 웃으며 넙죽 손까지 잡아 주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축하합니다. 신랑이 참 잘 생겼네요. 듬직하겠습니다.”
“어쩜 신부가 저리도 예쁠 수 있을까요? 목사님은 행복하시겠습니다.”
모두 덕담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와 아내의 입도 귀에 걸릴 것 같더군요. 저도 다른 결혼식에 가면 그렇게 인사를 하는데 그분들도 다 그런 마음이 들겠지요. 아무튼 결혼식은 모두를 즐겁게 행복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단 한 분도 우시는 분이 안 계시더군요. 얼굴을 찡그리거나 불평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분들도 안 계시더군요. 예배 순서 중에 기도하는 때만 잠시 진진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내내 웃고 또 웃으셨습니다. 먼 데서 오신 분들은 분명 몸이 피곤하실 텐데도 표정만은 환하고 밝았습니다.
요즘은 다들 뷔페를 하잖습니까? 얼마나 음식이 풍성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연어 회를 비롯하여 다양한 해산물이 나오고 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하객들 취향대로 마음껏 드실 수 있도록 푸짐하게 식사가 제공됩니다. 그러니 지인들끼리 모여 먹으면서 웃음꽃을 피우는 장면이 일품입니다.
제가 결혼할 때만 해도 그냥 갈비탕 한 그릇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야말로 국수 한 그릇씩 잡수시게 한 예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모두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당시 풍속이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분이심이 틀림없습니다. 종교적이기보다는 대단히 일상적인 분이셨습니다.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이 편안하고 여유로우셨던 분 말입니다.
일자: 2024년 11월 30일(토)
제목: 저는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9장 18~2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다.>(공동번역 개정판, 18~19절)
제일 먼저, 장례식장에 달려가서 관계자들 및 유족 대표와 장례절차를 의논한다. 입관과 발인 시간을 확정한다.
두 번째, 교회 조기를 빈소에 설치한다.
세 번째, 단골 꽃가게에 조화 바구니 주문한다.
네 번째, 성도들에게 부고 문자를 보낸다.
다섯 번째, 두 분 장로님께 전화로 장례일정을 설명드린 후 문자를 읽지 못하시는 성도님들 그리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상황을 알려드린다.
여섯 번째, 첫째 날 저녁에는 반드시 성도들을 모시고 위로예배를 인도하러 빈소로 향한다.
이것은 제가 채운교회에 부임한 후 장례절차에 임하는 매뉴얼입니다. 예전에 목회하던 곳에서는 부교역자들에게 지침을 내려서 진행했기 때문에 할 일이 비교적 적었는데 지금은 하나부터 열 가지를 제가 거의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빈소를 향할 때마다 빠짐없이 교회 승합차 운행도 하고 있고요.
지난 5년 이런 식으로 임하다 보니 큰 실수 없이 진행이 된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이 별세하셨다고 하면 이제는 거의 기계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은 역시 설교입니다. 위로예배, 입관예배 그리고 발인예배 성격에 맞게 말씀을 잘 준비하는 것이 늘 제게 주어지는 숙제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만 가끔씩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잘 풀리지 않습니다. 특히 고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경우 또는 비기독교인인 경우입니다. 그럴 때는 예배를 진행하는 내내 벽에다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시던 분이나 저와 개인적인 추억이 있으신 분인 경우 장례식 내내 서로 커다란 위로와 격려를 얻게 됩니다. 설교도 잘 이루어지고요. 그런 경우 장례식이 모두 끝나면 유족들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하곤 합니다. 그럴 때 저는 무한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유족들 가운데 한 분이라도 교회에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는 온 성도들의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드렸던 이와 같은 청을 단 한 번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셨으면 매뉴얼대로 움직일 생각만 했지 야이로가 보인 행동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열두 살 먹은 딸이 기절한 것이 아니고 방금 죽었는데 오셔서 기도해 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지요? 아무리 죽은 외동딸에 대한 사랑이 깊다고 해도 그렇지 죽은 아이가 살아날 것이다! 저뿐 아니라 제 주변에 있는 그 어떤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야이로의 믿음은 정말 탁월한 것이며 딸을 살려낸 예수님은 정말 위대하신 메시아이십니다.
일자: 2024년 12월 1일(주일)
제목: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9장 27~38절
‘예수께서는 모든 성읍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표준새번역, 35~36절)
참 오묘하면서도 감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부터 9장까지 제일 빈번하게 언급되는 것이 질병을 치유하는 내용 아닙니까? 한센인, 중풍병자, 열병환자, 악령에 사로잡힌 두 사람, 방금 죽은 열두 살 소녀, 혈루증 걸린 여인, 시각장애인 두 사람, 농아. 정말 다양한 질병이 소개되고 있네요. 거기다 9장 35절에서는 아예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야! 이렇게 쓰고 보니 예수님께서 종합병원을 운영하신 건가 싶습니다. 이런 병들을 다 치유할 수 있다면 지방에 있는 종합병원 정도의 규모는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혼자서 다 고치셨다는 말씀일가요? 진료과목이 서로 다른 경우 의사들끼리도 함부로 남의 전공분야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려 하던데요. 아무튼 놀라우신 예수님이 틀림없으십니다.
능력이 있거나 소위 영성이 깊은 목회자로 인정받으려면 최소한 이 중에서 하나 정도는 고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부흥회에 사람들 많이 끌어 모으고 헌금도 풍성하게 나오도록 하려면 여러 가지 언급된 질병 중에서 하나만 고친다고 해도 충분히 히트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도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에 병을 고치곤 한다고 말하더군요.
지난 주말에 유명한 부흥사이자 전직 교단 총회장이셨던 목사님 한 분이 90세의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분의 설교를 한 번도 들지 못했습니다만 그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면 눈을 찌르는 안수를 통하여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내쫓곤 하셨다는 말은 들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서울에서도 상당히 규모가 있는 교회로 발전했다더군요.
저는 안타깝게도 병을 고치는 일과는 거리가 있는 목사 같습니다. 오래전에 관련한 고백을 받은 일은 어렴풋 기억이 납니다. 어느 집사님께서 제가 기도해 드린 덕분에 몸이 좋아졌다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사실이라면 제가 명확하게 기억했을 텐데요. 예배 시간이나 기도 시간에 치유를 위한 간구도 그리 흔하게 하는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지도하는 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능히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인간존재를 친히 창조하신 분이시니 뭔들 못 고치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과거 조상들은 꿈도 꾸지 못한 탁월한 의학기술을 지닌 의사들과 좋은 시설의 병원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요 선물이라 믿습니다. 의료보험 제도도 아직은 괜찮고요. 그러니 좋은 병원에서 훌륭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진료받을 기회를 주십사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뛰어난 의사와 간호사님들을 통해서 질병을 고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며 처방받고 기도 중에 수술을 받도록 노력하십시오. 약도 기도하며 드시고요. 그리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병을 고칠 수 있든 없든 한 가지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질병을 몰아내고 귀신을 물리치는 일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약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애. 동포애. 인류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진심으로 공감하려는 태도와 자세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