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각오합시다

마태복음 10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2월 2일(월)

제목: 똑바로 향해야지요

본문: 마태복음 10장 1~4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공동번역 개정판, 1절)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저는 여러 번 갸우뚱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잖습니까?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에게 아주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악령들을 제어하고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고, 병자들과 허약한 사람들을 고칠 수 있도록 하셨다! 와, 목회자인 저로서는 정말 부럽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저도 이런 능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런데 사복음서 어디를 봐도 제자들이 실제로 이런 능력을 발휘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부실하다고 꾸지람을 당했으면 당했지 언제 병자들을 고치고 악령들을 내쫒았나요? 이 본문을 읽다보니 다음 대목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마치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서는 어이없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어느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항의하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내쫓지 못했습니다.”(표준새번역, 막 9:17b~18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미 치유와 축귀 능력을 주셨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은 전전긍긍했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다소 짜증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19절)


그리고는 그 아이를 온전하게 해주셨지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기록과 사실이 다른 걸까요? 예수님과 성경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하반신 지체장애인을 걷게 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시점으로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이후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중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연명하던 선천성 하반신지체 장애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다음은 그때 벌어진 일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표준새번역, 행 3:6~8절)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여러 가지 권능을 분명히 주셨다. 둘째,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은사를 제대로 간직하거나 선용하지 못했다. 셋째, 제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 붙들리지 못한 채 반생명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넷째, 하지만 많은 오해와 시행착오 그리고 궤도에서 이탈된 나날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향하고부터 오래 전에 주어졌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일입니다. 생명의 나라 구원의 나라.



일자: 2024년 12월 3일(화)

제목: 주의 샬롬을 빕니다

본문: 마태복음 10장 5~15절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공동번역 개정판, 12~13절)

요 며칠 간은 날씨가 비교적 좋은 편입니다. 물론 밤과 새벽에는 겨울 느낌이 날 때가 종종 있었지만 낮에는 ‘겨울이 왜 이래?’ 싶으리만큼 따뜻했습니다. 어제 낮 시간에는 태양빛이 꼭 초여름 같게 느껴졌습니다. 아! 이렇게 평온한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긴장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와 사택이 평지보다는 조금 높은 지대인데다 대나무 밭이 있는 야산을 끼고 있다 보니 그렇습니다. 특히 거센 바람이라도 불 때면 소리부터가 다릅니다. 바람소리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물론 산들바람이 불면 조용한 발라드 나 클래식 풍의 노래를 듣는 것 같지만 광풍이 몰려올 때는 마치 귀를 찢는 록음악이 연주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때인가 자다가 벌떡 깬 적도 있었습니다. 사택 지붕에서는 콩을 볶는 것 같은 빗소리가 계속 울리고 창문은 팔뚝 힘이 아주 강력한 사람이 연신 흔들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 소리는요? SF영화에서 거대한 악당이 내는 기분 나쁜 기계음처럼 들리곤 합니다. 그때는 ‘잔뜩 화가 난 바람이 내게 거칠게 말을 하는 걸까?’ 싶습니다.


지난 여름과 재작년 여름 어느 날 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채로 연신 보일러실 물을 퍼낸 적이 있었습니다. 대략 2시간 정도 그랬지요. 다음날 온 몸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야산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빗물. 마치 둑이 터진 것 같았습니다. 한참 퍼내는 동안 팔 힘이 달릴 때는 ‘이러다 쓰러질 것 같아’ 싶더군요. 아직은 젊다고 치고 내 나이 65세가 지나고 70이 되었을 때도 이런 일을 겪는다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들 때마져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렇습니다. 샬롬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평화로운 나날에 대해서 말입니다. 평안이 넘치고 화목이 가득한 가정 또는 우리 삶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한창 전쟁의 위험을 느끼던 지난 달 어느 날 밤 저는 거의 악몽을 꾸었습니다. 제가 개꿈을 꿀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내용은 실감이 날 때가 제법 됩니다. 그날 꿈은 제가 전쟁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저 혼자 살겠다고. 물론 꿈을 꾸는 내내 양심이 찔렸습니다. ‘어! 왜 자꾸 나 혼자 도망을 가지? 아이들은 어디 있고 아내는 무엇하고 있지?’ 내내 답답했습니다. 그러다 잠을 깨니 얼마나 허망하던 지요?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데 어떤 가정에서는 정말 불운이 계속 휘몰아치는 경우가 있더군요. 온 식구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비바람과 광풍이 그 가정을 뒤덮는데 바라보는 저도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럴수록 간절해지는 것은 샬롬입니다. 진정한 평안.


짧은 한 평생을 사는 동안 모두들 샬롬을 경험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슴 아픈 나날이나 피눈물 쏟는 인생을 사는 것만큼 힘겹고 고통스런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샬롬 내일도 샬롬. 서로가 서로에게 빌어주어야 하는 가장 값진 기도 아닐까요?



일자: 2024년 12월 4일(수)

제목: 틀리지 않은 말씀이군요

본문: 마태복음 10장 16~23절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공동번역 개정판, 16~17절)

제가 초기 한국사에 관한 공부가 깊지 않고 자료도 별로 없어서 고민하다가 챗GPT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약 100~140년 전 한국 기독교 초기 전래시기에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거나 순교를 당한 대표적인 사례를 좀 알려주세요. 특히 선교사나 복음전도자를 밀고해서 박해나 순교를 당한 경우.’ 그랬더니 다음과 같이 답을 해주더군요.


1. 이기풍 목사 (1865–1942)

배경: 황해도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 인물. 개신교 복음을 전하며 전도와 교회 설립에 헌신했습니다.


박해 사건: 초기 전도 과정에서 유교적 전통과 마찰을 빚으며 밀고로 관아에 체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전하기 위해 각종 모임을 주도했으나, 지역 주민 중 일부가 이를 불온한 활동으로 보고 관아에 고발했습니다. 관군의 조사 과정에서 “이단 사상”이라는 이유로 구타와 고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결과: 이후에도 복음을 전하다 여러 차례 협박과 박해를 받았으나, 그의 사역은 지역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 서상륜 (1848–1926)

배경: 황해도 소래교회를 설립한 한국 초기 개신교 지도자. 성경 배포와 전도에 열정을 다했습니다.


박해 사건: 서상륜이 전도와 성경 배포를 하던 중, 유교 사상을 지지하던 지역 관리와 주민들이 그를 관아에 고발했습니다. 밀고자들은 그가 “외국 종교를 퍼뜨리고 백성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체포된 후 그는 종교 활동 중단을 강요받으며 심문과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과: 박해를 받은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복음 전파를 위해 활동했으며, 소래교회는 한국 최초의 자생적 개신교 교회로 자리 잡았습니다.


3. 한석진 목사 (1863–1912)

배경: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회자 중 한 명으로, 성경 번역과 교회 설립에 앞장섰습니다.


박해 사건: 복음 전파와 개신교 확산이 당시의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고 본 지역 관리들이 밀고자를 통해 그의 활동을 감시하고 고발하게 했습니다. 체포된 한석진은 지역 관아에서 장시간 구타와 심문을 당하며 신앙 활동을 중단하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결과: 그는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며 계속해서 전도 활동에 나섰고, 그의 노력은 이후 지역 교회의 성장을 촉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공회에 끌려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위협을 당했다는 기사가 몇 차례 나옵니다. 또 채찍질을 당했다는 장면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보다 더한 시련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박해와 고난을 통해 전해 받은 신앙을 잘 간직해서 후대에 물려주어야겠습니다.



일자: 2024년 12월 5일(목)

제목: 담대합시다

본문: 마태복음 10장 24~33절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표준새번역, 28~29절)

저는 1995년 추운 겨울 특수전학교에서 공수기본훈련을 받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3주간의 지옥훈련이었습니다. 죽었다! 복창하고 훈련에 임해야 했습니다. 아침에 연병장에 나가면 땅이 꽁꽁 얼어있어서 삽으로 모래를 잘게 깨고서야 훈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웃통을 다 벗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기 위해서는 모래와 흙이 보드라워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부상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힘든 부분은 역시 이동할 때마다 뛰어다녀야 했던 일입니다. 낙하산을 타기 위해서는 몸을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어야 했으므로 쉼 없이 구보를 했습니다. 아침마다 격일로 5km와 2.5km를 달려야 했고, 밥을 먹으로 갈 때나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두 사람이 함께 ‘공수 공수 공수’ 하고 외치면서 뛰어야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3주 내내 구보로 이동하는 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힘든 훈련과정은 이른바 막 타워(Mock Tower)라 불리는 모형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모형탑의 높이는 지상에서 11m인데 그것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가장 공포를 크게 느끼는 것이랍니다. 거기서 훈련을 하는 이유는 훈련 마지막 3주차에 실시하는 강하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함입니다. 강하는 총 4회 실시하는데 비행기로 3회 그리고 기구로 1회 실시합니다. 막 타워 훈련은 비행기 기체 문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원활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제일 큰 공포심을 느끼는 11m에서 주저 없이 뛰어내릴 수 있다면 비행기에서든 기구에서든 그리 어렵지 않게 몸을 공중으로 날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모형탑에 오르니 정말 아찔하더군요.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몰랐습니다. 슬금슬금 기다시피 모서리에 서니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일순간 밀려오는 공포심이 엄청났습니다. 왜 괜히 공수부대에 지원해서 이 고생을 하는 거지? 후회 막심했습니다. 뛰어내릴 때는 눈을 뜬 채로 교관과 눈 맞춤을 하면서 과감하게 몸을 던져야 하는데 다들 겁이 나니까 즉시 감고 말았습니다. 저도 수 차례 그랬습니다. ‘야! 00후보생. 눈 떠. 크게 눈을 떠.’ 교관님께서 연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겁이 나다보니 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있구나! 그때 정말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후보생들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기만 할 뿐 과감하게 뛰어내리지 못해서 기합도 받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한 사람도 죽거나 크게 다친 일이 없었는데 그때는 왜 그리 긴장을 하고 불안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두려워하기보다 과감해지기로 했습니다. 몇 번 공중으로 몸을 날려보니 모든 훈련 장치는 대단히 안전해서 다치거나 죽을 일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인데 뭘 그리 두려워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인데 자동차에 받혀 죽거나 싱크 홀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공수부대에서 훈련받다가 다치거나 죽으면(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것도 영광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 지더군요. 무엇보다도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설마 나를 낙하산 훈련하다가 데려가실까?’ 결코 그럴 리 없지 싶었습니다.


일자: 2024년 12월 6일(금)

제목: 단단히 각오합시다

본문: 마태복음 10장 34~42절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공동번역 개정판, 34~35절)

이 같은 말씀만 뚝 떼서 읽으면 기독교 복음은 그야말로 ‘에미 에비도 몰라보는 00자식 같은 종교’ 아니냐는 혹평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애초부터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불효막심한 종교라고 공격을 받아왔는데 말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 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고요. 그런데 화목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니요?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게 하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등을 돌리도록 하려고 오셨다니.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패륜적인 종교인가요? 예수님은 가정파괴범이신가요?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가정은 화목과 사랑을 깨뜨리고 불화해야 하나요?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다툼이 있어야 하나요?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원수관계가 되어야 예수를 잘 믿는 것인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의 일반적인 가르침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성경은 결코 효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팩트 체크를 해볼까요?


우선,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 20:12) 이것은 그 유명한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기독교 복음이 효도를 부정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마 15:4) 이 말씀을 인용하신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이것을 준행하는데 그친 율법주의자들을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효도가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한 약속입니다.>(에베소서 6:1~3)


이로보건데 기독교 복음이 가족들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며 부모를 무시할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요?


누군가 진리를 지키려들거나 또는 진리의 길을 걸으려 할 때 때로는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와의 갈등이나 충돌도 있을 수 있으니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해주고 사랑하는 가족들일지라도 ‘진리’ 때문에 나를 미워하거나 비협조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진리냐 가족이냐, 진리냐 부모냐.


일제 강점기 또는 군사독재시대에 이런 긴장관계가 가족들 사이에 벌어지곤 했습니다. 또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을 버릴 것인가?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하여 가족들과의 갈등을 각오해야 할 것인가? 판단과 선택은 바로 신앙인들 각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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