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4년 12월 7일(토)
제목: 실망이 크지 않아야 할 텐데요
본문: 마태복음 11장 1~6절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하였다.>(표준새번역, 2~3절)
“야! 거기 어때? 늦가을인데도 볼거리 많아?”
“그럼, 이런 때 제주가 이렇게 멋있는 곳일 줄 몰랐어. 정말 끝내줘.”
“그래? 나는 제주 그러면 봄에 피는 유채꽃만 생각했는데 가을에도 멋있는 것이 많구나. 그럼 여행경비 하나도 아깝지 않겠네.”
“그렇지. 우리는 이번에 완전히 본전 다 뽑은 것 같아. 너도 기회 있으면 꼭 와봐. 둘레 길도 운동하기에 좋고 가을꽃과 바다도 환상적이다.”
추워지기 전에 친구 목사 내외가 제주로 가족여행을 갔다며 단톡에 사진을 올려서 여러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저는 10월에 수련회가 갔었는데 그때와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는지 연신 제주도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국에서만 내내 생활하신 분들은 잘 못 느낄 수 있는데 우리나라 정말 멋있는 곳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영국에서 살다오기 전까지는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지난 가을 제주에 갔을 때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 이 나이에 비로소 우리나라 좋은 줄 알게 됐구나.
사실 아직도 가보고 싶은 국내 여행지가 적지 않습니다. 목회일정 때문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고 재정적인 문제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지 여건만 된다면 매주 여행을 다니고 싶습니다.
국내 여행이 좋은 몇 가지 이유를 들라면 이렇습니다. 첫째, 음식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둘째, 깨끗한 화장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셋째, 물갈이 걱정할 일 없어서 좋습니다. 유럽 같은 경우 석회질이 많아 잘 못 마시면 골치 아픕니다. 넷째, 전국 어디를 가도 말이 다 통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외국 여행은 우선 언어 때문에 제약이 많아서 아무나 붙잡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다섯째, 저 같은 경우 웬만한 지역마다 아는 이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사전에 그곳 정보를 더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밥 한 끼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잖습니까?
기대감! 이처럼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름 기대하고 바라는 사항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기대가 충족되면 다음에 또 찾게 되고 주위에 널리 알리게도 됩니다. 누군가 부탁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반대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망하거나 불평하게도 됩니다.
이런 것은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인성이나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실망이 큽니다. 결혼하고 나서 부부가 자꾸 다투게 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은 절대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실망스러워. 사돈 남 말하네. 결혼 전에는 너그럽고 친절하고 잘 기다려주며 이해심도 깊더니 이게 뭐야? 이 사람아 그런 당신은?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당신이 그러는 거 내가 싫어하는 줄 뻔히 알면서 왜 그랬어? 그러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눈물을 흘리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잖습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실망이 컸던 모양입니다. 이스라엘 민초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말라고 격려하셨지만 그는 옥중에서 고뇌가 깊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힘들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일자: 2024년 12월 8일(주일)
제목: 어떻게 해석할까요?
본문: 마태복음 11장 7~12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공동번역 개정판, 11~12절)
12절 말씀이 언제나 묘한 느낌을 줍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침노라는 것은 상당 부분 폭력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무력으로) 쳐들어가서 빼앗는 사람이 결국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의미이지요?
표준새번역으로는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다소 순화된 느낌을 주지만 결국은 힘을 써서 차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대인의 영어성경(CEV)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From the time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violent people have been trying to take over the kingdom of heaven by force.’ 표현이 아예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violent people, take over...by force. 단어만 곱씹으면 마치 조폭들이 어딜 들이닥쳐서 완력 또는 폭력으로 차지한다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지난주 초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에 들이닥친 계엄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헬기와 장갑차, 군용 지프, 기관단총, 저격용 총, 개인화기로 중무장한 특전사 707 특임 대대원들이 계엄군이 되어 본청 깊숙이 들어온 광경이 연상되는군요.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네요. 제가 2년 동안 몸담았던 9 공수 특전여단도 참여했던데요. 그래서 더욱 서글프고 안타깝습니다.
1996년 잠수정을 타고 온 북한군들을 섬멸했던 강릉무장공비 사건 때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워서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특전사 부대들이 이번에는 계엄군이 되어 지탄을 받게 되었으니 군 통수권자와 계엄주동자들이 어찌 밉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적잖은 피해를 입고 희생을 당했는데 이번에는.
하지만 12절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향한 열정 의욕 갈망 노력이 필요하다. 평화란 그저 주어지는 것인가요? 실은 엄청난 수고와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비평화 세력과 때로는 갈등하고 다투고 싸우기까지 해야 합니다.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일 또한 결코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정과 상식 통하는 세상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이번 비상계엄이 실패로 끝났던 이유는 그저 얻은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온몸으로 막아냈습니다. 참다운 세상을 짓밟히지 않겠다는 강력한 열망이 계엄군을 좌절시켜 버렸습니다.
둘째, 하나님나라를 무너뜨리고 방해하려는 자들이 늘 있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개역개정)는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표준새번역)란 침략을 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공동번역 개정판)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또 폭행을 당해왔을까요? 반평화 불의 부정 폭력 반인권 세력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나라를 정면으로 가로막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그런 반역이 있었습니다.
일자: 2024년 12월 9일(월)
제목: 희망이 보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11장 13~19절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표준새번역, 16~17절)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당신께서 사셨던 시대에 적잖은 사람들은 목석같았나 봅니다. ‘목석’ 같은 사람! 어간해도 감정의 변화 이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 누군가 숨넘어갈 듯 재미있는 유머를 써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목석같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감정이 풍부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인형이 아니지 않습니까?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감정은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 기술발전 여하에 따라 인간과 별 다름없는 감정을 표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이 과연 우리 사람의 감정과 비교될 수 있을까요?
저는 TV는 거의 시청하지 않지만 유튜브는 즐기는 편입니다. 가끔씩 노래를 즐길 때가 있는데 이상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더군요. 저도 모르게 그러는 모양입니다. 거의 반사적으로요.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아파트라는 곡은 확실히 사람들 마음을 일순간 즐겁게 만드는 요술사 같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을 어쩜 이리도 즐겁게 만드는 걸까요?
어떤 노래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승철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서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찡해지는 곡이 있습니다.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대도 / 그런 사람 또 없을 테죠 음음 /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 준 / 잠 고마운 사람입니다 / 그런 그댈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 얼마든 아파도 좋은데 / 사랑이란 그 말은 뭇 해도 /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오오 우 우’
연예 프로그램에서 들어도 가슴이 먹먹한 데 어느 해 그가 대단히 비통하게 생을 마감하신 전직 대통령의 추모제에서 불렀을 때는 눈물이 폭포수 같이 쏟아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 나라는 사람은 다행히도 목석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최근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윤석열 씨 퇴진 시위에서는 2030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마치 콘서트를 연상케 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잠시 귀를 기울여 봤습니다. 벌써 13년이 지난 영상이더군요. 유명했던 걸그룹 소녀시대가 부른 ‘다시 만난 세계(Into The New World)’는 가사는 다 알아먹지 못했지만 대단히 경쾌하더군요. 그때 그런 노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퇴근에야 말았습니다.
아파트라는 세계적으로 유행한 노래도 시위현장에서 불린다고 하더군요. 저희 세대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광경인데 정말 사람의 마음을 밝고 즐겁게 만드는 힘이 있나 봅니다. 시위 현장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다니! 역시 우리 기성세대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젊은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럽습니다.
다행입니다. 우리나라는 슬퍼해야 할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기뻐해야 할 때 날아갈 듯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네요. 분노할 때 화를 낼 수 있고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대한민국!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당분간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잘 이겨낼 것입니다. 왜 내고요? 감성이 마그마 같이 살아있으니까요.
일자: 2024년 12월 10일(화)
제목: 그러게 잘하지
본문: 마태복음 11장 20~24절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에게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표준새번역, 21~22절)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역사가들은 반드시 이 일을 기록할 것입니다. 아직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았기에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명하고 용기 있는 국민이 어리석고 부패한 지도자를 이긴 시대!
저는 농촌에 있는 아담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30년 남짓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노련할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오판을 벌일 때도 있습니다. 참 어려운 것이 사람들을 이끌고 마음을 한 데로 모으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도 서로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다양한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은 설교를 준비하느라 적잖은 시간을 들입니다. 일주일에 최소 10회 이상 설교합니다. 예정에 없던 설교순서를 맡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독서도 해야 합니다. 설교를 누가 대신 써주지 않듯이 책도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교회규모와 관계없이 무엇인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해야 할 때는 며칠을 끙끙 앓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때는 언제일까요? 설교 시간에 성도들에게 소위 은혜를 끼치지 못하고 있다 생각될 때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한 일은 교인수가 줄어들고 헌금액수가 감소될 때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현상이 벌어지면 당회가 있는 경우 장로들이 담임목사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더 많이 전도하거나 헌금을 더 많이 해서 부족한 부분을 메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수년 동안 새 신자 한 명 이끌고 오지 않은 이들이 담임목사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웁니다.
요즈음은 사무총회 기간입니다. 저희야 내년 1월 초에 개최할 예정이지만 대부분은 12월 중순과 말에 끝냅니다. 며칠 전 후배 목회자들 몇 분을 만났는데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제가 제일 선배여서 푸념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경험담도 서로 나누면서 위로하고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지금 넋두리한다고 오해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출석교인이 채 100명도 되지 않는 교회를 담임하면서도 전술한 바와 같은 온갖 일들을 겪으며 진이 빠지고 힘들어하는데 하물며 5천만 국민을 리더 해나가야 하는 대통령의 고충은 얼마나 클까요?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와 외교 군사 등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막중합니까? 그러니 때로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대단히 고통스럽고 외로울 것입니다.
대통령의 자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경기침체로 인하여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던 비상계엄령을 발동한 일 때문에 국민적인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리더십 때문에 온 나라가 처절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책임을 지라고 그 엄청난 봉급과 활동비와 막대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잘 감당해소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라고. 이 모든 일이 바로 그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그러니 잘했어야지요.
일자: 2024년 12월 11일(수)
제목: 잘 나고 똑똑한 게 다요?
본문: 마태복음 11장 25~30절
<그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공동번역, 25~26절)
어린 시절부터 저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이들이 참 신기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똑똑할 수가 있을까?’ 남들 한두 개 겨우 암기하거나 이해할 때 머리 좋은 애들은 열 개도 더 외우는 것 같았습니다. 미분이니 적분이니 수학문제는 또 어떻게 그렇게 술술 풀던 지요? 저는 지금도 그 수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 기억나는 몇몇 고등학교 급우들이 있습니다. 그 애는 신장이 크고 덩치가 좋았습니다. 싸움도 잘했습니다. 물론 욕설에도 능숙했고요. 여전히 제 노리에 깊이 남아있는 그에 관한 기억은 마치 깡패 같이 놀던 애가 어찌도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지! 서울 법대를 갔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워낙 공부를 잘하니 선생님들이 그 애를 혼내거나 때리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SKY대학을 나온 이들은 공부 머리에 관한 한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무조건 인정. 저 같은 범인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얻더군요. 제가 286 컴퓨터급 두뇌라면 그들은 586 이상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되더라고요. 분명히 같이 떠들고 놀았는데 칠판에 쓰인 문제를 푸노라면 결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문제집을 풀 때도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가끔씩 천재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를 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개의 칠판에 빼곡 쓰인 희한한 공식의 화학이나 수학문제를 푸는 주인공은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두뇌입니다. 아!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이들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입니까?
유튜브에서 우연히 영화 ‘어메이징 메리’(2017년) 요약본을 조금 본 일이 있습니다. 유튜버가 이런 부제를 달았더군요. <MIT 교수를 수학으로 털어버리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7살 천재 소녀.> 다 보지 않아서 내용은 잘 모르지만 영화제목과 부제가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범상치 않은 이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
몇 해 전에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쓴 ‘지성적 회심’이라는 자서전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신학자입니다. 그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 중에 일부를 옮기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명민하고 수학과 물리, 화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여 22세 때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년 후 같은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놀라운 학업적 성취를 이루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런 특출한 역량을 발휘하다니요. 저는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의 책을 읽는 내내 그저 감탄하고 감격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같은 사람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셨네요. 하나님께서는 그저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들만 좋아하시지는 않는다니 말씀입니다. 스스로 잘난 체하고 최고라 자부하는 이들보다 겸손하게 주를 섬기는 평범한 이들을 더 기뻐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가능한 진실하고 정직하며 선한 이가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