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지 않으세요?

by 신완식

2026년 1월 1일(26)

2026년 3월 7일(27)

2026년 3월 9일(28)


무엇을 뜻하는 날짜냐고요? 장례식장에서 발인예식을 집전한 날짜를 적은 것입니다. 물론 조문과 입관예식도 제가 다 집전했고 화장터를 거쳐 선영에서 인도한 하관예식도 마찬 가지입니다. 괄호 안에 있는 숫자는 6년 남짓 시무하고 있는 현재 교회에서 집전한 장례식 횟수입니다. 6여 년 동안 스물여덟 번째라니요...


연말에 별세하신 분은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몇 가지 지병을 앓고는 계셨지만 수 십 마리 염소를 돌보면서 농사도 별 탈 없이 잘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맛있게 식사를 하셨고 활동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심장마비라는 불청객이 예고 없이 찾아와 그녀를 집 안마당에서 쓰러뜨렸습니다. 무방비 상태! 아들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우리와 다른 세계로 떠나신 후였습니다. 그녀는 유난히 저를 많이 의지하신 분으로서 이제 막 나이 일흔을 맞으셨지요. 저를 비롯한 교우들은 문자 그대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3월 7일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신 분은 사실 교회를 거의 출석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5개월 전에 남편을 먼저 보내드린 후 급격히 무너져 내리셨지요. 물론 남편도 제가 야산에 위치한 선영에까지 가서 고이 묻어드렸고요. 미국에서 급히 달려온 아들과 며느리가 어머니에 대해 신신당부를 하여 저는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시더군요.


스물여덟 번째 분의 죽음 또한 충격적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제가 스물일곱 번째 장례식을 막 치르고 돌아와 잠시 밀린 업무를 보는 동안 조용히 눈을 감으셨답니다.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신 뒤 대문 안에 놓아둔 의자에 앉으신 채로 말입니다. 따님이 주말을 맞아 방문했다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자칫 며칠씩이나 그 상태로 방치될 뻔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그 소식을 통보받은 시간은 별세하신 때로부터 최소 4시간 남짓 지난 뒤였습니다. 연속적으로 장례를 치른 일이 몇 년 전에도 있었는데 또다시 맞으니 제 몸과 마음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장례식장에 가니 내가 목사인지 장례사인지 헷갈릴 것 같았습니다.


세 분의 별세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모두 여성이라는 점. 두 분은 80대 초중반이시고 한 분은 이제 막 70이 되셨습니다. 더 중요한 공통점은 ‘삶에 대해 비교적 의욕이 적었다는 점’입니다.


한 분은 5개월 전 남편을 먼저 보내자마자 ‘나도 남편 곁으로 빨리 가고 싶다.’는 의사를 빈번하게 표하셨습니다. 제가 요양병원에서 직접 들은 것만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아! 별로 살고 싶지 않으시구나. 눈동자를 보나 얼굴 표정 그리고 목소리에도 그다지 의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의자에서 앉은 채로 눈을 감으신 분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데다 약 20여 년 전부터는 중풍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오랜 세월을 대단히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 보니 지칠 대로 지치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가정방문을 갔는데 문득 “목사님, 질문이 있어요.”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성경이나 또는 신앙에 관해 물으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질문 내용을 대단히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저를 빨리 안 데려가세요?” 아마도 4년 전쯤 들은 질문 같습니다. 이후 종종 유사한 질문이 반복되었습니다.


심장마비로 별세하신 분은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들 때문에 속이 썩을 때로 썩으신 분이셨습니다. “솔직히 살맛이 안 나요. 제가 무슨 낙이 있어 살겠습니까?” 다행히 제 아내와 제가 틈틈이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드린 덕분에 조금씩 멋도 부리기 시작하셨고 심지어 선글라스까지 착용하셨지요. 물론 화장도 하셨고요. 아참, 제가 강력히 조언을 하여 염색을 하시니 십 년은 젊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원초적 의욕상실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애를 쓰며 노력하는데도 상황에 변화가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삶에 대한 열망, 살고자 하는 의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강하면 시련이나 곤란을 극복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각종 환자들을 상대하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수님의 선언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공동번역 개정판, 막 5:34)-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성을 치유하신 후.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눅 17:19)-한센병을 고치신 후.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38년 동안 제대로 거동을 하지 못했던 사람을 낫게 하시기 전에.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는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살고 싶으신가요?’ ‘의지를 꺾지 마세요.’ ‘삶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품으세요.’ 저도 경험한 바 있고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의욕이라고 봅니다. 약을 처방받거나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우리 개개인이 삶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 또한 소중하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에는 이번에 차례로 별세하신 분들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생활이 밝습니다. 유머를 즐깁니다. 식사도 잘하시고 쉴 새 없이 움직이십니다. 뭔가를 자꾸 찾아서 일하십니다. 정부에서 펼치고 있는 노인 일자리도 대단히 요긴해 보입니다. 일이 있는 분들과 일거리를 찾아서 계속 활동하시는 분들은 멍한 눈으로 천정만 바라보는 분들과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즐겨합니다. 내가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도 손을 놓으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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