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포기하지 맙시다

마태복음 13장

by 신완식

일자: 2024년 12월 20일(금)

제목: 많이 모이니 좋습니까?

본문: 마태복음 13장 1~9절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더니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공동번역 개정판, 1~2절)

연말입니다. 매년 이맘때면 저 같은 목회자들은 연말당회니 정책당회니 사무총회니 하는 것들로 분주합니다. 세례교인 통계도 내서 지방회에 곧 보고해야 하고 재정보고서도 작성해야 합니다. 각 기관 인사도 정리하고 직분자도 세워야 합니다. 언제나 두 가지가 신경이 쓰입니다. 교인수가 늘었느냐 줄었느냐 그리고 재정 상태는 어떠한가? 수입이 작년 대비 얼마나 늘었느냐? 이 두 가지가 호전되었으면 담임목사는 당회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만 그렇지 못할 경우 직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목회자들에게는 보통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다음 달 우리 지방회 직원세미나 강사로 제 후배 목사가 옵니다. 아주 잘 아는 사이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가깝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 교단에서는 제법 비중이 있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저도 오래전 오후예배 때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본당이 아주 넓더군요. 교인 수도 많았고요. 저는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교회에 가게 됐는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큰 교회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강사로 불려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방문하신다면 아마도 정신이 혼미해지실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교회가 다 있다니!’ 그러실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적응하시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많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처럼 여겨지는 곳입니다. 큰 교회로 정치인들이 몰립니다. 연예인들도 그렇습니다. 크게 사업하는 사람들이 소규모 교회를 출석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당 인사 중에는 본래 천주교 신자인데 지난번 총선을 코앞에 두고서는 제 친구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새벽기도회를 나왔다고 합니다. 친구가 인증 샷을 남겨서 알게 됐습니다. 이번에 당대표를 꿈꾸고 있는 그녀는 어제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더군요. 야당지지자들이 국회를 둘러싸서 막으며 심한 말을 하는 바람에 계엄령을 중단시키는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노라고. 새빨간 거짓말! 당신이 믿는다는 천주님께 미안하고 부끄럽지 않소?


저도 그럴 때가 있는데 목회자들은 한 사람의 신자가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도 무척 괴로워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또 담임목사의 리더십이나 영성을 탓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일은 교인들의 몫 그렇지 못한 일은 담임목사의 몫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도 다 겪어봐서 압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반성이 들더군요. 내가 정말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교회로부터 받게 될 질책이 부담스러워서 그럴까? 아무튼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선(善)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부실함이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특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태도와 마음을 묵상할 때면 그래도 용기가 납니다. 그분은 사람을 통계수치로 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성공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더 많이 알려지고 영향력이 확산되는 길로써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무리들이 몰려온다고 환영하거나 즐거워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기회 있는 대로 외치실 뿐이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주님! 고맙습니다.


일자: 2024년 12월 21일(토) 새벽 5시

제목: 알았느냐 몰랐느냐

본문: 마태복음 13장 10~17절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하고 말하지 않았더냐?>(공동번역 개정판, 14~15절)

우리는 종종 뭘 잘 몰라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알았더라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겠습니까?


요즘 새로 나오는 차량들은 후방 카메라가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덜 합니다만 예전에는 후진하다 사고를 내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날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아빠가 운전하는 모습을 본 어린 아들이 반가운 나머지 방방 뛰면서 아빠를 맞이했습니다. 차량 뒤에서요. 젊은 아빠 운전자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린 아들도 그런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습니다.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이라도 아빠 차에 치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들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과연 그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지금 한창 12.3 비상계엄 사건에 관한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저는 특전사에서도 근무했고 기갑여단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두 부대가 가진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탱크와 장갑차가 기동을 시작하면 무한궤도에서 독특한 소리가 들리는데 듣기만 해도 든든했습니다.


그들은 자나 깨나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근무할 때만 해도 총부리를 국민에게 돌린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명의 지휘관도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적은 북괴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군인들을 동원하여 군사반란을 획책했다니 지금도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깰 지경입니다. 새벽기도에 가려고 매일 새벽 3시 50분에 기상을 하면 가장 먼저 포탈 뉴스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간밤에는 별일 없었겠지? 설마 또 그럴 일은 없겠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어느 날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우리 역사가 50년 전으로 역주행을 한다면? 다시 정치군인들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환한 대낮에 길을 걷다가 불심검문을 당한다면? 설마 통행금지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아니겠지? 사람들이 몇 명만 모여도 경찰들이 강제 해산을 시키는 일은 없겠지? 젊은이들의 두발을 제한하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자로 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가 현저히 규제되고 다시 땡전 뉴스가 등장하지는 않겠지? 설마?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뉴스에 나오는 보도를 보니 핵심 멤버들은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더군요. 하지만 어떤 군인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와서야 상황을 접할 수 있게 되었더군요. 모르고 왔다는 소리이겠지요. 결국 알고 했느냐 모르고 했느냐에 따라 처벌의 경중이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알고 강행한 군인들은 법이 제대로 집행이 된다면 중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내란의 수괴는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지는 것이 군법이라지요?


옳지 않은 줄 알고도 했으니 처벌이 중차대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모르고 온 이들은 선처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관계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각한 죄인 줄 알고서도 어기는 것과 전혀 모른 채 가담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 큼이나 커다란 간극이 있지 않을까요?



일자: 2024년 12월 22일(주일)

제목: 우선 잘 들어야지요

본문: 마태복음 13장 18~23절

“너희는 이제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들어라.”(표준새번역, 18절)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23절)

저는 목회를 하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처절하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주. 물론 이런 것은 목회현장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모여서 누군가가 말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말을 들을 때면 의당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역지사지해야 합니다. 남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말을 해봐야 합니다.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일을 업으로 삼다 보니 매번 설교 때마다 절감하게 됩니다. 동일한 성경본문과 제목을 가지고 동일한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설교하는데 어떤 분은 냉소적입니다. 본인은 못 느낄 수 있겠지만 그의 눈빛과 얼굴이 노골적으로 반응합니다.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소!’ 그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말이 맴돌고 있을 것입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는 ‘내가 읽은 책에서는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설교자가 무슨 천사도 아니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각적으로 팩트 체크를 하고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백한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 경우는 어쩝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설교를 듣는 내내 저와 마음으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끝까지 안 들을 거요!


어떤 분은 눈은 저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은 화성을 지나 목성으로 날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 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침에 화장실 세면대 물을 잠갔나 안 잠갔나 고민하고 계신 건가요? 아님 예배 끝나고 어느 극장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볼까 생각 중인가요? 아! 벽에다 대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시뻘건 벽돌에 말입니다.


간밤에 무엇을 하셨기에 설교 시작하고 5분도 안 지나서 눈꺼풀이 벌써 두 눈을 가로막고 있는지요? 저도 설교 시간에 깜빡 졸아본 경험이 있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바로 눈꺼풀이더군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졸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못 느낀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설교를 듣기 시작했는데 뭔가 조용하다 싶더니 세상에... 어떤 분은 목이 꺾어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조셔서 설교하는 제가 다 불안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목 디스크가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설교자에게 제일 큰 힘이 되는 분들은 역시 시종일관 사랑스러운 눈과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집중하십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노트에다 설교를 요약하고 메모하면서 듣습니다. 아! 감동. 가수들도 그러더군요. 청중들 가운데서 그런 분들이 있으면 힘을 얻는다고요. 연극배우들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리액션이 좋은 청중들이 많으면 연기가 잘되고 쉬 지치지 않는다고.


저는 어디 가면 거의 맨 앞줄에 앉아서 듣는 습관이 있습니다. 대학원 다닐 때 전 장학금을 받은 학기가 몇 번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눈을 쳐다보면서 웃기도 하고 슬픈 표정도 지으며 반응을 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싼 등록금 내고 강의를 듣는 것인데 그래야 본전을 뽑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의문이 생기면 질문을 했고요. 제가 교수님들의 맘에 들었나 봅니다. 수고한 보람은 성적과 장학금으로 보상이 되더군요.


잘 들어야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잘 듣고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삶에 적잖은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적지 않습니다.



일자: 2024년 12월 23일(월)

제목: 현실에서는 그렇답니다

본문: 마태복음 13장 24~30절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하고 대답하였다.”>(공동번역 개정판, 28~30절)

‘세상에 어떻게 인간이 저 모양이야?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 수 있어? 저건 사람도 아니야. 짐승도 저렇게는 못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저런 인간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데려가셔야 해. 저런 사람들 때문에 무서워서 살 수가 없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서 마음이 조마조마 해. 제발 저런 사람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어...’


이것은 영화 시나리오의 한 대목이 아닙니다. 네플릭스에 상영 중인 드라마 시리즈의 대사도 아닙니다. 예전에 이웃들로부터 가끔씩 듣곤 했던 넋두리였습니다. 푸념도 그렇지 정도가 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하지만 때로 악질적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병적인 악행을 뉴스로 접할 때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런 사람 좀 데려가시지요. 도저히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제 입에서도 짐승만도 못한 사람 같으니 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입니다. 차라리 영화의 한 장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목사의 자격이 없지요? 온전히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하는데 때로는 선택적인 사랑을 베푸나 봅니다.


이번 12.3 군사반란을 놓고도 이와 유사한 반응을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계엄령이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해제가 된 것은 최근 세계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다행하게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도 자신들의 목숨을 건 시민들과 국회의원 보좌진들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불안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 그리고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은 군인들의 정서를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인들과 군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살신성인의 정신과 위국헌신의 태도로 임한다면 그들의 나라를 위한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무력을 그저 정권이나 호위하고 권력을 비호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1980년 5.18 광주 때의 공수부대원들과 1996년도에 있었던 강릉무장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승전을 한 공수부대원들은 적잖은 차이가 납니다. 누가 그들을 어떤 일을 위해 쓰려고 하느냐가 핵심 아니겠습니까?


속속 드러나는 계엄령의 이유와 목적을 종합해 본 전문가들 중에서는 ‘저런 반란세력들이 사람입니까?’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더군요. 하마터면 제2의 광주와 같은 비극이 발생할 뻔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더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는 평가도 내리고 있고요. 저는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가득하게 하소서. 단 한 사람의 생명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런 극악무도한 자들이 마지막 심판 때까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가라지들을 뽑다가 알곡들이 다칠까 싶어서랍니다. 안타깝게도 현실 역사 속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지요.

일자: 2024년 12월 24일(화)

제목: 쉽게 포기하지 맙시다

본문: 마태복음 13장 31~35절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공동번역 개정판, 31~32절)

아마도 제가 고3 때였지 않나 싶습니다. 부산 온천중앙교회를 담임하고 계셨던 차몽구 목사님께서 어느 날 재미나는 구경거리 하나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즈음 목사님께서는 성지순례를 다녀오셨던 모양입니다.


“학생들! 내가 얼마 전 이스라엘에 갔다가 성도들에게 보여 드리려고 겨자씨를 사 왔어요. 그런데 씨앗이 너무 작아서 자칫하면 콧바람에 날아갈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내 명함 뒤에다 씨앗을 유리 테이프로 봉해두었으니 한 분 한 분 나와서 보고 가세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겨자씨! 제가 난생처음으로 본 것이 그때였습니다. 정말 조그마하더군요. 자칫 콧바람에 날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 결코 빈말이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아주 큰 기대를 안고 보러 나갔는데 한편으로 실망했습니다. ‘아니 저렇게 작은 씨앗도 있나? 저런 씨앗도 자라서 나무가 되고 그 위에 새들이 앉게 된다고?’ 어린 나이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도 같습니다.


챗 GPT에게 겨자씨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니 이런 대답을 하더군요.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으로, 크기는 약 1~2mm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씨앗은 적합한 환경에서 자라면 키가 2~4미터에 이르는 큰 나무나 관목으로 성장합니다. 겨자는 요리, 약용, 농업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됩니다. 예를 들어, 겨자씨로 만든 겨자 소스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조미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야! 예수님께서 식물학을 공부하셨던가요?


그리고 챗 GPT는 겨자씨가 주는 교훈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1. 작은 것의 중요성: 겨자씨는 아무리 작은 믿음이나 행동이라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2. 성장의 잠재력: 우리의 믿음과 삶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 하나님의 일은 작은 시작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정도로 커질 수 있습니다.’


AI가 참 신통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척척 답을 할 수 있지요? 그런 뒤 설교를 위해서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네요. ‘1. “작지만 강력한 믿음” - 작은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라나는지. 2.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 - 개인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고 확장되는 방법. 3. “성장의 신비” - 믿음의 성장과 성숙의 과정.’


겨자씨를 비롯한 씨앗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땅이 꽁꽁 얼어서 어쩔 수 없겠지만(아니 봄부터 가을까지 고생을 많이 한 까닭에 겨우내 쉬면서 정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시 봄이 돌아오면 힘찬 기지개를 킬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뚫고 일어나 가지를 뻗고 꽃도 필 것입니다. 그 생명력을 생각하니 벌써 봄이 기다려지네요.


겨자씨를 생각하면 쉽게 기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보잘것없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연줄이 없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스스로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겨자씨 같은 미약한 씨앗도 이렇게 크게 자라나고 성장하는 법인데 사람인 우리가 스스로 자포자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자: 2024년 12월 25일(수)

제목: 용서해 주세요

본문: 마태복음 13장 36~43절

“인자가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법한 일을 하는 자들을 모조리 그 나라에서 모아다가, 불 아궁이 속에 던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표준새번역, 41~43절)

저는 용서를 인정합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은총의 표현입니다. 성경 도처에 용서와 관련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두어 군데에서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공동번역 개정판, 마 6:14~15절)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표준새번역, 엡 4:32절)


저는 용서의 힘도 믿습니다.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는 이유와 명분이 있을지라도 기꺼이 용서할 때 생겨나는 화목과 상생의 놀라운 역사도 인정합니다. 저는 지난 22일 주일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용서와 관련된 언급을 했습니다.


‘최근 세계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지도자는 남아공 대통령을 지낸 고 넬슨 만델라입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흑인들이 겪고 있던 비인간적인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일을 하다가 44세에 반역죄로 체포되었습니다.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나 약 27년 만에 출소했습니다. 그의 나이 72세였습니다. 이후 노벨 평화상을 받은데 이어 흑인 최초로 남아공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76세 때 일입니다.


그가 젊은 변호사 시절 겪었던 수많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불의한 권력자들 그리고 27년간의 억울한 투옥살이를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보복하거나 복수하는 일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화해와 용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흑인인권운동을 벌이던 자들을 화형 시키거나 총살형에 처했던 불의한 권력자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넬슨 만델라 같은 권력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킨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전쟁광 히틀러, 이태리의 독재가 뭇솔리니,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약 30만 명을 학살했다고 알려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잔혹한 탄압으로 수 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그들의 말로는 대단히 비참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었습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국민으로부터 차디차게 버림받았습니다.


권력으로써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섬기고, 하나로 통합하며, 모두가 다 잘 수 있도록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며 인권을 신장시킨 사람들은 하나님과 역사가 인정합니다. 하지만 총칼과 탱크와 헬기로 국민을 위협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이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았습니다.’


용서란 무턱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넬슨 만델라가 베푼 용서가 중요합니다. 첫째, 자신이 범한 불법과 불의 폭력 등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그런 죄를 충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해야 합니다. 셋째, 반성한 뒤로는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용서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정의 없는 용서는 허상이요 속임수입니다.


일자: 2024년 12월 26일(목)

제목: 몰빵 합시다

본문: 마태복음 13장 44~46절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공동번역 개정판, 44~46절)

“야! 내가 이거 다 줄게. 그거 나 주라.”

“싫다. 내가 왜 주냐?”

“야! 그러지 말고 나 줘. 이게 더 좋은데...”

“무슨 소리야. 내 것이 훨씬 좋은데. 안 줘. 절대로 안 줘.”


꼬마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가끔씩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한창 구슬치기 놀이를 하고 있는데 웬 녀석이 큼직한 은색 왕 구슬을 가져온 게 아닙니까? 오! 처음 보는 것이라 얼마나 신기하게 생각이 되었던지요. 바라보는 꼬맹이들 눈이 다 휘둥그레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몰빵! 영어로는 All-in입니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한 가지에 전념한다는 뜻이지요. 우리 애는 지금 기말고사 준비에 올인 중이야. 우리 아빠는 요즘 주식 투자에 몰빵 중이셔. 다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사안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집중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주식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태 단 한 번도 투자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때로 정말 몰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요 때다 싶어서 올인을 했다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는 신문기사를 본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반대로 쪽박을 찬 경우도 들었고요. 그러니 몰빵 혹은 올인이란 상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 죽느냐 사느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제 생애 최초의 몰빵 또는 올인은 지금 아내를 쫓아다닌 일입니다. 정말 죽자 살자 했습니다. ‘이 여자 아니면 안 되겠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총각 전도사 시절 목회비가 월 20만 원이었는데 어느 달 전화비가 19만 여원 나왔더군요. 교회 장로님께 가불을 요청했더니 그러시더군요. “전도사님! 제 평생 교역자가 가불 해달라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그러면서 인자한 표정으로 싱긋이 웃으셨습니다. 하지만 장로님께서는 내심 조금은 서운하셨을 것입니다.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혹 저와 연결이 될 수 있을까 하셨거든요. 결국 그 따님은 현재 모 교회 사모로서 사역 중이라고 합니다.


저는 당시 대구에서 전도사로 사역 중이었는데 몇 군데서 은근히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대구에서 장가를 들기를. 하지만 이미 저는 당시 4학년 졸업반이던 아내에게 모든 것을 건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꼬드겨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삐치셨는지 말도 안 거시더군요. 제가 그 권사님 손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요. 똑똑해서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제가 몰빵을 하고 있던 터라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습니다.


세상사이든 신앙적인 부분이든 때로는 몰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쳤다가는 아무것도 잡지 못할 수가 있으니까요. 하나님 나라도 때로 그래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몰빵하라. 올인하라. 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그 나라를 향해 몰빵 하신 분이시지요? 그 나라를 향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시고 기꺼이 내던지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분은 전혀 머뭇거리시거나 주산 알을 튕기지 않으셨습니다. 올인!


일자: 2024년 12월 27일(금)

제목: 심판도 있어야겠지요

본문: 마태복음 13장 47~52절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공동번역 개정판, 49~50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뻐 박수를 치며 함박웃음을 터뜨릴 것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몹시도 불편한 기색을 보임과 아울러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분노 속에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작용할 것이고요.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이 들 테니까요.


최근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국가적인 비상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 땅 대명천지에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라니요. 친위쿠데타라니요.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 극장에서 관람했던 영화 <서울의 봄>을 다시 본 것인가 싶습니다. 그리고 12.3 이후로 생긴 습관. 기상과 동시에 포탈로 들어가 뉴스를 검색하는 일. 솔직히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군대를 조금 아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탱크 부대에서도 근무해 보았고 특전사에서도 사역해 본 사람 아닙니까?


이제는 반란 우두머리로 규정된 자를 국회에서 탄핵하자 여의도공원에서는 그야말로 축제가 벌어졌지요? 기뻐서 펄쩍펄쩍 뛰며 우는 젊은이들이 있었고 70이 넘은 어르신도 감격의 눈물을 쏟으셨더군요. 사실 저도 감사의 박수를 쳤습니다. 군대는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일에 생명을 바치는 조직이지 자국 국민을 향해 탱크를 모는 악의 무리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27세에 임관하여 38세에 전역하기까지 군대에 그야말로 젊음을 쏟아부은 저로서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레 입었던 군복인데 그 우두머리 때문에 제가 몸담았던 공수부대원들을 반란군으로 전락시키다니요! 분노가 일었습니다.


마침내 한덕수 총리도 탄핵이 되었지요?(*저는 이 글을 새벽기도회가 있었던 밤에 쓰고 있습니다.) 저는 또다시 기뻐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어서 속히 국정이 정리되어 다시 비상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해서지요. 그와 아주 오랜 친구였던 한 야당 의원(나이가 82세라고 합니다)에 따르면 한덕수 씨의 부인은 무속에 대단히 관심이 깊다고 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날을 잡을 때는 무당에게 찾아가서 날짜를 받아온다는군요. 세상에!


나라가 정말 무당천지가 된 것인가 싶습니다. 반란 우두머리의 아내, 탄핵당한 총리 아내, 반란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전직 정보사령부도 무속인, 건진 법사니 천공이니 하는 이런 자들이 어떻게 21세기 최첨단 과학기술시대에 나라를 주도한다는 말입니까? 부끄러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다.


상황이 이런대도 적지 않은 보수성향의 목회자들이 계엄을 지지하고 탄핵을 반대한다더군요. 저 또한 여러 영역에서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자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지할 것이 있지 어떻게 군사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지지합니까? 그리고 무속을 의지하며 국정을 꾸려나가는 이들을 다름 아닌 목사들이 축복하고 지지한다는 말입니까? 복음과 무속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무속신앙 아닙니까? 도대체 그런 목사들은 어떤 성경을 읽고 어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를 강조하지만 준엄한 심판도 믿습니다. 불의를 행한 자들 마귀의 졸개노릇을 한 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심판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자: 2024년 12월 29일(주일)

제목: 그들의 삶도 궁금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3장 53~58절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공동번역 개정판, 55~56절)

어머니 마리아,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누이들. 예수님 가족들 명단입니다. 그 목수라고 한 것을 보니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았던 같지 않습니까? 이름을 대지 않은 것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상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느끼고 있습니다. 제 두뇌는 플라톤이니 데카르트니 헤겔이니 하는 철학자들의 이론보다는 이야기 역사 또는 사람 중심의 스토리에 더 익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점 말입니다.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인문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딱딱한 선언적인 학문적 이론보다는 현실에서 경험할 법한 진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사람 사는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 민중신학 관련 책을 제법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신학이라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펼쳐나가는 서양 신학자들의 수많은 학설들을 대하노라면 머리가 쉬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민중신학에는 민담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의 민요 전설 판소리 나아가 이름 없이 이 땅을 살다 간 민초들의 숨결과 땀을 체감할 수 있어서 책이 술술 읽혔습니다. 다른 신학서적에서는 울컥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우리 조상들의 구슬픈 이야기들과 한 많은 우리 역사 속 사건과 사고들을 접하다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도 자주 받곤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이 들려주신 눈물겨운 이야기들은 늘 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설교하다 보니 당연히 주인공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때로는 사도 바울이 또 때로는 모세나 엘리야를 주연으로 등장시켜 설교를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또 안전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이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성경에 많기 때문에 저 같은 목회자들에게는 안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특히 성경 속 난세 때 한 번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 이름도 없이 ‘그’ 혹은 ‘그들’처럼 3인칭으로 처리되고 있는 사람들, 또 무리들로 표기되고 있는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과 탄식이 궁금합니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때 자신들을 이끌고 있던 영웅에게만 눈길을 주고, 심지어 그로부터 수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영웅에게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누이들. 이 중에서 다분 몇 마디라도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 야고보 그리고 유다 정도입니다. 요셉과 시몬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이름이라도 기록으로 남아 있네요. 그러니 제가 궁금한 이들은 누이들입니다. 예수님의 여동생들!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오라버니인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제게 여동생이 한 명 있어서 유난히 궁금합니다. 철저히 예수님께 가려진 여성들. 그들에게도 분명히 삶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동생들이 경험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요? 르뽀집에서라도 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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