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날에도 집에 오는 데 이상 없지?”
“네, 주일 오전예배 마치고 정리한 뒤 출발할 거예요.”
“그래, 점심 잘 챙겨 먹고 조심히 와서 우리랑 저녁 먹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두천 소재 모 교회 부목사로 재직 중인 큰 아들과 오늘 오전에 나눈 통화 내용입니다. 지난 추석에 이어 아들과 며느리가 이곳 논산에 온답니다. 설을 쇠려고요. 아들이 오는 것도 반갑지만 며느리가 함께 오니 제가 더 신이 났습니다.
큰 아들이 결혼한 지도 4개월 후면 벌써 2년째를 맞습니다. 결혼 후 네 번째로 시댁에 오는 것인데 며느리는 부담이 안 된답니다. 며느리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100%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평소 주고받는 문자나 통화 그리고 표정을 봐서는 그리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아들이 결혼하기 전에 아내가 제게 신신당부하더군요.
“여보, 요즘 며느리들은 우리 때랑 달라서 절대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대요. 명절에 시댁에는 올 거냐? 애기는 언제 가질 거냐? 이런 소리는 절대로 입 밖에 내면 안 된대요. 알겠지요? 명심 또 명심하세요.”
아들이 결혼을 하고 첫 명절을 맞아 내려오기 전에 저와 아내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첫째, 아들 며느리를 위해 반드시 호텔을 예약해 주자. 시댁에서 함께 자자고 하는 것은 다시는 며느리를 안 보겠다는 의사표시 아니겠나.
둘째, 명절 기간 중 며느리에게 절대로 밥상을 차리게 하지 말고 가능한 외식을 하자. 혹시 한 끼 정도 집에서 먹더라도 밥은 시어머니가 차리고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하자.
셋째, 아들과 며느리가 아이를 갖기까지는 손주 ‘손’ 자와 애기 ‘애’ 자는 아예 우리 집 사전에 없는 것으로 하자. 그런 말 하는 순간 관계는 끝난다고 생각하자.
넷째, 2박 3일 시댁을 찾는 일이 며느리에게는 즐거운 휴가기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자. 그래서 매번 동두천으로 돌아갈 때는 가벼운 발걸음이 되게 하자.
다섯째, 평소에 자주 전화하는 일 삼가고 특히 문자 보내는 일 조심하자. 가족 톡방에 며느리를 초대하는 일은 아들 내외를 불화의 늪에 빠뜨리는 것으로 알자.
지난해 추석 때까지 저와 아내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입니다. 우선 이미 한 달 전에 호텔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아들 며느리 나이가 서른일곱인데도 여태 ‘손’ 자와 ‘애’ 자는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들 중 상당수가 이미 손주를 보았지만 저희 부부는 세상에 손주라는 존재가 다 있나 싶도록 단 한 번도 티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늘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몇 년 후배인 목사 한 분이 어느 날 그러더군요. “손주를 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참 나... 그래, 나는 아직 인생을 모른다.
제가 며느리에게 좋은 시아버지가 되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제 선친께서 제가 고3 때 돌아가셨습니다. 제 아내는 시아버지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나요? 아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그 사랑을 며느리에게는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소박한 제 마음입니다.
또, 아들에게 시집와준 며느리가 저는 마냥 고맙습니다. 제 아들은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내서 사고방식이 토종 청년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참 다행하게도 며느리가 그 점을 잘 이해해주고 있습니다. 며느리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베이징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둘 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해외에서 보냈기에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연년생 아들만 둘 키운 저와 아내에게 며느리는 사랑스러운 딸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혹시 부담스럽게 생각할까 봐 내색은 하지 않습니다. 이제 닷새만 지나면 반갑게 보겠군요. 집안 대청소를 해야겠습니다. 식사할 곳도 정해야겠고 구경할 곳도 알아놓아야겠습니다. 지난해 추석 때는 부여에 있는 박물관 구경을 갔는데 이번에는 서천이나 군산항으로 가서 회를 대접할까 싶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구경거리들을 미리 알아봐야겠습니다.
지난번에도 아들 며느리를 제가 너무 티 나게 반겼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노련한 시아버지가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런데 닷새가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