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을 오르던 날,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치고 싱그러운 산에 운무가 내려앉았다. 푸른 잎들이 저마다 손짓을 하며 방긋 웃음을 웃는다.
송광사에서 암자로 가는 길은 <무소유길>로 한가로운 오솔길을 따라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1km 남짓 된다. 빗방울 맺힌 잎들과 드믄드믄 피어있는 키 작은 풀꽃들과 고목에 핀 촉촉한 이끼들까지 물기를 머금은 그 빛이 얼마나 곱던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스님께서 수만번은 오르내리셨을 대나무 숲길을 오르며 이쯤을 딛고 가셨을까 저쯤을 바라보셨을까 생각하는 일..
그러다 피식 웃어보기도 하면서 어느새 문 앞이다. 단아하고 예쁜 문이다.
대나무 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면 아치로 우거진 대숲 사이로 암자 한 채가 그림처럼 나타난다.
이곳은 무소유를 실천하셨던 법정 스님께서 손수 짓고 17년간 수행하셨던 곳이다. 담백한 본채하나와 하사당, 재래식 해우소, 씻을 곳, 그리고 작은 텃밭, 꼿꼿한 기품을 지닌 스님께서 사시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스님의 말씀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깨달음이 되었던 이유라도 찾은 듯 숙연해진다. 스님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아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쉬어갈 의자 몇 개 그리고 물 주전자 하나,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임을 새겨 보게 하는 풍경이다. 나무 의자에 앉아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다. 뻐꾸기도 울고 종달새도 노래한다. 한 모금의 물이 이처럼 달고 정신이 이렇게 맑아질 수 있을까?
가볍게 찾았던 산사의 며칠이 깊은 사색으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던 시간.. 사는 일도 매 순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라 여겨 시간에 집착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 나를 본다. 언제부턴가 몸이 따르지 않는 일에 욕심을 내서 마음을 들볶고 사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것을 두고 스님께서는 소유라 하셨을 테다.
예전에 즐겨 읽던 스님의 산문집에 <늙음은 축복이다>라는 글이 생각난다. 그때는 머리로 이해하려 했던 글귀였는데 지금은 공감을 넘어 가슴으로 파고든다.
늙음은 축복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늙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일찍 떠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늙었다는 것은
오래 살았다는 것이고
사랑과 기쁨과 슬픔의 파란만장한
난관을 모두 이기고 살아
왔다는 것이다.
늙음은 사랑과 정을 나누며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은 삶의 기회이며
진정한 축복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많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많이 즐겁게 살 수가 있고
많이 살았다는 것이다.
....... 이하생략
불일함을 내려오며 거창한 다짐 같은 거 말고, 소소하나 행복한 일, 그러면서도 가치 있는 일들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소박한 바람 같은 걸 되뇌어 본다.
Photo/2024.04.30.
불기 2568. 부처님 오신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