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서소문 근처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햇살은 눈부시고 공기는 달큰하고 길 건너편 이화여고 가는 길로 유난히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몇 그루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 색이 너무 고와서 내친김에 그쪽까지 가보고 다시 정동길로 발길을 돌려 계획에 없던 산책을 했다. 보통 11월 초부터는 제법 색 고운 단풍을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나뭇잎들이 초록인 채로 말라가고 있고 단풍색도 그다지 곱지가 않아 아쉽던 중이었다. 아마도 지난여름 무더위를 견디느라 나무들도 온 힘을 다 써버려 마지막까지 버틸 힘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을지 안쓰럽다.
이화여고 담장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 문화일보 뒤편으로 해서 정동길을 들어서자 노란 은행나무 길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예쁘다. 아마도 이곳의 단풍은 이번주에서 담주 사이 절정일 듯싶고 올해 본 은행나무길 중에선 비교적 색이 젤 곱게 물든 것 같다. 역시 단풍은 청명한 날 아침햇살 아래서 봐야 젤 예쁘다.
청춘에 거닐던 정동길에는 이문세의 노랫말 속에 나오는 교회가 있고 성당이 있고 극장이 있고 덕수궁 돌담길도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 비를 맞으며 추억의 발자취를 따라 거닐다 정동극장 앞에 멈춰서 포스터도 읽어보고 극장 안을 살찍 기웃거려 보기도 하면서 호젓한 아침 산책을 즐겼다.
오전이라 인적도 드물고 밤새 떨어진 낙엽들도 이슬에 젖어 그대로 남아 있고 뜻하지 않은 횡재라 쾌재를 부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덕수궁 돌담길이다.
이 길을 몇 해 전 봄밤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는데 은은한 조명아래봄의 새순을 뽐내며 서 있는 나무들과 돌담이어우러져 그분위기가 얼마나 운치가 있던지, 그 이후에도친구들과 몇 번을 더 가서 밤늦도록 통기타 버스킹도 즐기며 낭만이 넘치던 봄밤을 즐기곤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 정동길은 언제와도 정답고 누구랑 와도 좋은 만인의 데이트 명소인 것은 분명하다.
시립미술관의 정원에도 가을 색이 물들었다. 고목이 된 단풍나무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 마치 아는 지인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 아름다운 미술관 외관에 비친 가을 정취가 아름다워서 잠시 벤치에 앉아 햇볕을 즐겼다.
시립미술관에서 대한문으로 가는 길 좌측 돌담길 아래 노동자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스피커를 통해 찢어질듯한 고성과 함성이 계속되니 애꿎은 관광객들만 피해를 본다. 이곳 시청역 부근은 주말에도 도를 넘는 시위대의 고성으로 마음불편하고 시끌벅쩍할 때가 많다. 언제쯤 되어야 이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룰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정말 걱정되는 이 나라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덕수궁 앞에 이르렀다.
대한문 앞에 비잉 둘러싸인 행렬과 관광객들 사이로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는 것이 보인다. 어느새 11시가 지난 듯 개식 타고 와 군호하부, 수문장 교대의식이 차례로 이루어진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은 서울시가 영국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과 같은 문화상품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1996년 탄생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이 기거하던 궁궐의 정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수문군들의 근무교대 모습을 재현한 행사로 전해진다. 궁성, 도성문 개폐의식, 궁성 시위의식, 행순의식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월요일을 제회한 연중무휴로 매일 2회 11시와 14시에 진행된다.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어서인지 궁안은 비교적 한산하다. 입구에 서서 바라다 보이는 나무들은 색을 입고는 있었으나 키만 자라고 품이 없어 고풍스럽고 단단한 힘이 느껴지질 않는다. 다른 고궁에 비해 자주 찾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 오늘은 나무를 이렇게 관리하는 숨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전인 중화전을 지나 석조전 뒤편의 산책로를 따라 구석구석 한 바퀴 돌아보고 후문으로 나왔다.
가끔은 뜻하지 않은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질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 하루다. 올해는 정동길에서 가을의 절정을 만났고 불쑥불쑥 넘나들던 두서없는 생각들로 꽉 찬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