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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향 Feb 26. 2024

추상화가의 추상적 웅얼거림

노란 문을 열 때

노란문을 열 때

남은 페인트가 노란 색뿐이라서 문을 노랗게 칠하고, 청년들은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휴대폰도, 당연히 배달앱도 없던 시절 그들은 ‘죽 들어오시면 노란 문이 보여요. 그리 가지고 와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노란문’의 신화는 시작되었다. 뭘 하고 싶은지, 무얼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가고 싶지 않은지는 분명했던 청춘들은 조그만 방에 하나뿐인 원탁에 둘러앉아 영화에 집중했다. 90년대 민주화라는 거대목표를 이룬 청춘들은 잠시 방황하면서 개인의 취향에 몰두하기 시작한 듯하다. 

영화 서적도 영상자료도 귀하디귀한 시절 그들은 청계천 등지에서 어렵사리 구한 불법복제 비디오 테잎을 화면에 비가 죽죽 내리도록 보고 또 보면서 화면들을 분석하고 발표하고 공부해 나갔다. 아무 지침도 없이 본능적으로 숲을 헤쳐 나간 것이다. 이때 영화에 몰두하던 청춘들 사이에서 ‘정부에서 전국민을 시네필(cinephile: 영화광)을 만들려고 약물을 풀었다.’는 농담이 돌 만큼 수많은 영화 동아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여러 시네필들은 서로 접속하고 연결해 나가면서 더 큰 힘으로 뭉쳐나갔다.     

 

1974년 여름의 더위는 유난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기록상 더 덥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마도 그 여름의 독특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해 여름 대구에서는 국내 최초로 현대미술제가 열렸다. 대구에 큰 화랑도, 미술관도 없었던 시절이라 대봉동 일대의 8개 정도의 화랑에 산재해서 열렸다. 그때까지 내가 본 미술작품이라곤 보고 또 보던 미술교과서에서 본 작품들뿐이고, 어느 누구도 내게 현대미술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정보를 어디서 내가 얻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다. 그 뜨거운 여름, 지도를 들고 화랑을 찾아다녀서 내가 마주친 것은 그냥 ‘경악’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래더미를 바닥에 쌓아두고 관객들(은 없었다!)의 발길에 차여 매번 모양이 변하는 것, 양동이에서 물이 흘러넘쳐 바닥을 점차 적셔 나가는 것,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계속 물감을 던져서 화면을 만들고 있는 중인 것...... 지금이야 이런 작품들이 식상할 정도로 많지만 그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작품인 거지? 계속 형태가 변한다면 도대체 누가 작품을 하는 거지? 

하교길에 빙빙 돌다 걸어내려와서 버스를 탔던 한일극장 앞의 맥향화랑에서 추상화도 처음 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저건 또 뭐지? 이 불편함에 대해서 물어 볼 데도 없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에 눈물이 핑 돌던 나도 그 속에 함께 있었다. 아마 그게 나의 노란문 안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90년대말의 시네필 청춘들 중에서도 편집적일 정도로 집요하게 영화를 공부했던 봉준호 감독은 그 노란문 안에서 ‘고릴라’라는 작품으로 생애 최초의 시사회를 스무 명 남짓한 동호인들을 두고 치렀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후일 세계영화제에 참석해서 세계의 영화인들에게서 ‘도대체 20세기말에 한국영화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런 우수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에 그는 20세기 말 한국에는 ‘노란문’과 같은 수많은 시네필 청춘들이 모여서 성숙해가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문은 들어갈 때도 열고 나올 때도 연다. 누구나 위대해질 수는 없지만 기체같은 꿈이라고 해서 휘발해 버리지는 않는다고 믿는 것, 내가 나의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몰랐던 시절’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모두에게 '노란 문' 안의 자신을 귀히 여기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건 당신만의 오롯한, 마르지 않는 샘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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