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업일기

스치다, 그리고.....Brushing pass, &.....

by 조미향

가끔 작업실에서 작업에 대한 생각을 써본다. 처음 작업일기를 쓴 것은 조기퇴직한 후 시내 한복판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늘 시간에 쫒기며 그림을 그리다가 조기퇴직을 결정할 때는 그림을 더 많이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 잘 그리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냥 숨 막히도록 바쁜 가운데 작업하면서, 내 그림에 나의 '숨통트임'을 좀 전해주고 싶어서 결정한 일이었다. 내 생활의 빈틈들이 그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막상 공적 직장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작업실에 출퇴근하면서 정작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감정에 압도당해버렸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이 빽빽한 밀도로 나를 압박했다. '직장을 던지고 나왔으니 반대급부의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바빠서 직관적으로 해내던 작품의 근거는 무엇인지, 나는 왜 이런 작업을 하는지에 대한 자기해석은 어떻게 하나?' 하는 것들이 그 밀도를 만들어냈다. 종일 작업실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Moment of Tree, acrylic on canvas,27x22cm,2024



정리가 필요했다.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를 쓴다는 의식도 없었다. 다만 기존의 평론가들이 보여주는 작업설명 방식은 피하고 싶었다. 과장된 언어, 현학적 해석, 이론에 종속시키는 작품 이야기는 피해서 쓰고 싶었다. 인생에 있지도 않은 기승전결도 피하고 싶었다. 어딘지 모르고 걸어가다 갑자기 벼랑을 만나면 뚝! 떨어져버리는 것이 더 인생의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방식으로 쓰고 싶어하니 결과는 자연히 은유적인 글로 나타났다. 이런 글들을 여기에 실어본다. 추상을 하는 사람으로서 작품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마음들이 여기에 담겼는지 이 기회에 나도 좀 되짚어 보고 싶다.



나는 등에 얹은 구름을 가볍게 털었다. 구름은 뚱하니 몸을 일으켜 초승달 아래로 기어 들어간다.

그 아래 큰, 은빛 날개를 가진 새가 몹시 빠르게 날아간다.

나는 그것의 속도와 굉음이 좀 부담스럽다.

소리를 피해 가장 키 큰 나무로 내려 앉는다.

아래……나무들은 빠른 속도로 시선을 당겨 내려가고,

깊숙한 계곡에는 어제 온 비로 흙탕물이 격렬하게 넘쳐 흐른다.

물고기들은 다소 당황한 몸짓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 계곡 바닥 아래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있다.

(인간들이 독수리! 하고 나를 올려다 본다.)

*나는 이런 것을 그린다. So what?

Moment of Tree, acrylic & korean ink on canvas, 127x127cm, 2025



이 작업일기는 이 글을 쓰기 훨씬 전에 최초로 추상으로 가는 지점 어디에선가 했던 생각을 쓴 것이다. 20호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갑자기 '본다는 게 뭐지? 우리가 보는 건 사물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차려놓은 정물대의 화병, 꽃들, 테이블보, 광선 이런 건 사람이 그것도 의도적으로 놓은 것들인데 생명을 가진 모든 시선들이 이렇게 보지는 않지 않나? 독수리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일 텐데? 그때 수직적 시계가 열린 것 같았다.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을 던지는 계기가 왔다. 아마 그림 그리고 5년 쯤 되었을 때 같은데 그것이 추상으로 넘어가는 데는 또 오년 쯤 더 지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비로소 그림에 이야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삼만 리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