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따쥐 이야기 2
‘한복을 입고 베르니샤쥬(개막식)를 하자고?’ 전혀 모르는 도시에 있는 곳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그룹 리더로부터 제안이 왔다. 한국문화를 거의 모르는 곳이니 해 보자고. 한복을 입는 게 어색한 나는 몹시 툴툴대면서도 가방에 부피 큰 한복을 챙겨넣었다. 사실 내게 한복은 혼사 외에는 입을 일이 없는 옷이라 친해질 시간이 없었기에 입기가 난처한 옷이었다.
그런데 막상 베르니샤쥬에 온 프랑스인들은 한복에 대해 감탄해마지 않았다. 한국인과 한복을 본 일이 없는 관객들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옷이 있느냐고 감탄하였다. 그 자리에 프랑스 전역에 한국식 정원을 다섯 군데 설치할 계획을 추진 중인 정원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그는 나도 한국 가면 이거 살 수 있느냐?, 입어봐도 되냐?고 하도 탐을 내서 결국 우리 리더와 디자이너는 축구 선수들 마냥 그 자리에서 옷을 바꿔 입었다. 둘다 싱글벙글이었다. 그 디자이너의 셔츠가 대단한 고급 옷이었던 것.
우리 손자가 한국어 안다고 그 자리에 계신 관람객들이 이야기했다. 동양인이라고는 없는 이 작은 도시에서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구석구석 있다니......그때 한류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순간 우리는 개인 작가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문화사절단이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날 저녁 같은 시간대에 지역 음악회와 두 개의 갤러리 개막식이 있었는데, 우리 쪽으로 거의 90여 명이 와서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의 눈길을 끄는 작품 앞에 오래 머물고 전시정보를 열심히 읽었다. 프랑스인들은 읽는 것을 좋아해서 전시장에 와서도 자료들을 매우 꼼꼼하게 읽는 편이라고 한다. 다음 개인전 때는 모든 자료를 프랑스어로 잘 준비해야겠다고 느꼈다. 우리 모든 작가들은 누군가의 눈길 앞에서 그런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의 수다 체험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섯 시에 시작된 행사는 12시가 넘어서야 모두 돌아갔다. 프랑스인들은 학생 때부터 토론수업에 훈련이 되어서 밤새도록 토론하는 게 일상이라고 하는데, 그 저녁의 주제가 뭐였냐고 나중에 물어보니 ‘이 지구적 현상에 기성세대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였다고 한다. 그 주제라면 밤을 샐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는데 음식 얘기로도 그렇게 말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피니샤주(finissage:폐막식) 행사가 있다는 걸 현장에 가서야 알았다. 전시가 끝나는 날 관람객들이 작은 선물들을 들고 와서 함께 와인을 마시고 떠들고 놀면서 ‘작품하고 전시하고 또 철수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작가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피니샤쥬였다. 피니샤쥬 얘기를 듣자 우리 작가들은 각자 전시 철수하는 날의 쓰라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나의 첫 개인전은 학교 일정에 맞춰서 12월에 열었는데 IMF가 시작하는 시점이라 봉산동 문화의 거리가 얼어붙어 정말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하루종일 혼자 전시장을 지키며 일정을 끝내고, 작업실도 없던 때라 집으로 작품들을 들여놓고 무언지도 모르는 감정에 밤새 시달렸다. 그리고 그게 쓰라림이라는 걸 전시회가 거듭되면서야 알았다.
이번 빡따쥐 갤러리의 피니샤쥬는 지역의 꽤 유명한 연주자가 본인이 공연을 선물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진행되었다. 전자보드로 일렉트릭 재즈를 연주한 그 날, 100년 간 지속된 이 건물의 술집이 다시 연 줄 알고 한잔하러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파리에서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보냈던 연주자는 쥬아니에서 자신의 삶이 정화되고 새로운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그는 우리 갤러리에서 요청하면 언제든 피니샤쥬 연주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상처가 쥬아니에서 위로받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완벽하게 캄캄한 밤과, 고흐가 보았을 것 같은 저녁 하늘, 건강하고 유장한 포도밭에서의 산책이 나에게도 삶의 본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프랑스는 예술가의 어려운 마음까지 이해하고 어루만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사회였던 것이다. 마을 산책길에 마주친 그들의 따뜻한 눈길에는 이 오래된 마을에 둥지를 튼, 먼 나라 한국의 예술가들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담긴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동네사람이 모두 들르는 1유로짜리 커피집에서 그들과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와 같은 눈빛을 교환했다.
괜히 프랑스가 아니었다. 내 마음에 커다란 자리를 만들며 들어앉은 쥬아니도 그러했다.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