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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사짓는 뚱여사 Feb 23. 2021

동태찌개를 끓이면

당신을 그리워하며

"엄마는 언제 철들 거야? 바쁜 사람한테 전화 좀 그만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딸내미 무서워서 전화나 하겠니!"

이것이 엄마와 나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런 퉁퉁하고 뾰족한 통화를 마지막으로 나의 엄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으로 내게 왔다.


엄마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었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엄마의 죽음이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말라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기 15년 전, 나는 철없는 스물세 살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남자를 허락하지 않아서 우리는 매일이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이미 아이 둘을 키우고 있던 남자를 허락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을 하면서도 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나는 집을 나왔고, 그런 내가 너무 미웠던 아버지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까지 하셨다. 그렇게 나는 친정을 놓쳐버렸고  아버지와 나의 시간은 거기에 멈춰버렸다.

서로에게 완강한 아버지와 딸 때문에 애간장이 녹는 사람은 나의 엄마였다. 아버지도 나도 엄마에게 너무 냉정하고 단호했기에 엄마는 아빠 몰래 나에게 연락하는 방법으로 딸을 그리워해야만 했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하며 시작한 결혼생활이었지만,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얼마 되지 않아 차가운 세상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신랑하고 있던 사업이 잘 못 되면서 살고 있던 집과 차와 사업장까지 모두 잃었고, 우리는 엄청난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쫓기듯이 남편의 고향이자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진도라는 섬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시골 인심이 좋다는 말은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알아듣기도 어려운 사투리는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었고,

내 뒤에서 들리는 수군거림 끝에 작은 각시라는 단어는 나의 이름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같은 걸로 내 마음이 상할 여유없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카드회사와 신용정보회사의 빚 독촉 전화에 갚아야 하는 대출이자와 원금, 연체이자..... 영혼까지 너덜거리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그런 날들이었다.


시부모님은 농사일을 하셨지만 돈을 벌기보다는 겨우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소농이었다.

집에 있는 날은 시어머님과 함께 밭일, 논일을 하기도 했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살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던 나는 몇 년 뒤 온몸에 진흙을 묻히고 논 가운데서 모내기를 하는 농부라는 직업으로 살게 되었다.


의욕과는 다르게 우리는 흙을 몰랐고, 작물을 몰랐다.

그러니 수확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형편없는 바보 농부였다. 농사를 지을수록 돈을 벌기보다 빚이 더 쌓여갔고,  빚으로 도배가 되어가는 일상들은  마음까지 가난한 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더 건조해져 갔고, 삭막한 내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먼지 구덩이가 되어버렸다.

딸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은 엄마의 전화가 반갑지 않았고,  일을 해야 하는 나를 방해하고 시간만 빼앗는다는 생각만으로 귀찮아했다.

"거 봐라 우리말 안 듣고 나가더니 너 하고 있는 걸 봐라!"

"내가 고생한다고 했지?"

 "그런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

"어제 꿈에는 네가 나와서 전화해 봤어."

"김치는 담글 줄 알아? 내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나는 네가 멀리 간 것 같지가 않아. 내 옆에 있는 것 같아."

엄마의 분노는 걱정이 되고 아쉬움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변하고 있었는데,

나는 엄마가 처음 던진 가시에 찔려 걱정이 되고 그리움이 된 엄마의 마음을 외면하고 가시에 찔린 상처만 자꾸 들춰보며 나를 비웃고 내가 포기하고 잘못을 인정하길 바라고 있다고 치부해 버렸다.

반드시 성공해서 보란 듯이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리라는 오기만 쌓아가며,

나를 찔렀던 엄마의 가시보다 더 뾰족하고 큰 칼을 만들어 엄마에게 던져버리는 못되고 못난 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더 뾰족하게 칼을 갈아 엄마에게 던지던 못난 딸은 어느 봄, 

모내기가 한창이던 논두렁 가운데서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들으며 애먼 잡초만 한주먹 잡아 뜯어내며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떠나왔친정은 15년 만에 낯선 엄마의 장례식장이 되어 돌아갈  있었다. 장례를 치르면서 내 마음대로 울음으로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던 나는 죄인이었고, 나를 용서해줄 이는 그곳에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직 엄마의 냄새가 남아있는 친정집에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해놓은 밑반찬들과 쉬어버린 밥과 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 오는 내 목구멍으로 쉰밥과 국을  넘기면서 내 죄의 무게를 더 무거운 추로 바꿔 달아 내 목에 걸었다.


집으로 내려오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해있었고, 그 회색빛 풍경이 엄마의 그림자 같아 보였을 그때 비로소 쏟아져내리는 내 눈물로 내 가슴을 내리치며 못나고 못난 철없는 스물세 살의 어린 딸로 엄마품에 안기며

"내가 잘못했어...."

" 내가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줄 이 없는 용서를 빌며 며칠 동안 고여있던 참회의 눈물을 그 길에 뿌려놓았다.


엄마가 없어진 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엄마를 잃은 나의 세상은 캄캄한 암흑 속에 갇혀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세상을 벗어나고 싶지도 벗어날 이유도 없던 나는 그렇게 나를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얼마 동생이 앨범  권을 보내주었다.

앨범에 빼곡한 엄마의 사진들......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를 그곳에서 만났다. 내가 없던 엄마의 시간들은 불행했을 거라는 내 짐작 대신, 항상 나와 함께 했던 것처럼 엄마의 환한 웃음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시처럼 들었던 엄마의 말이 내게 다시 들려왔다.

"네가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아."

"김치 담그는 거 알려줄까?"

"꿈에 네가 나와서 전화했어."

"네가 농사지은 쌀이 먹고 싶어."

"너 만날 때 뛰어가려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

"네가 좋아하던 포도를 보니까, 네가 생각이 나서..."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내 캄캄한 세상에 그렇게 엄마는 구멍을 뚫고 있었다.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거슬려했고 귀찮아했던 나는 구멍을 뚫어대는 엄마를 원망했지만,  그것이 모두 나를 위해 뚫고 있던 구멍이라는 걸....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내가 숨을 쉴 수 있었고,

구멍으로 들어오는 그 빛 덕분에 차디찬 내 몸뚱이를 녹일 수 있었음을 그때에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태찌개를 끓이면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바느질을 하다가 엄마랑 손뜨개하던 때가 생각이 났어."

"TV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가 나오는데, 엄마 목소리가 들려서 울음이 나왔어."

"걸레질을 하는데, 내 손이 엄마손 같아서 깜짝 놀랐어."

"콩밭을 메는데 까마중이 있어서 그걸 따먹던 엄마 얼굴이 떠 올랐어."

"엄마가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아."


고추가 유난히 붉고 이쁜 그런 날에도,

하늘이 푸르고 붉게 물드는 그런 날에도,

논에 가득한 물이 유난히 반짝이는 그런 날에도,

이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마흔일곱 살의 내가 서있는 이 들녘이 포근한 까닭은

내 세상에 내리쬐는 그 빛 덕분이라는 걸,


언제나 너무나 해맑았던 내 엄마,

지금도 나와 함께 웃고 있을 당신,


그렇게 나의 엄마는 무엇으로도 내게 와 있었고,

어떤 것으로도 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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