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 연재27》
여기저기서 매화가 터집니다. 숨김 수 없는 향기는 하늘로 올라가다 꽃샘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낍니다. 꿀벌도 날파리도 없는 이른 봄에 매화향기는 홀로 아득합니다. 꿀벌은 벚꽃이 피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활동합니다. 그래서 봄에 처음 나오는 꿀이 벚꿀인데, 그 양이 하도 적어서 꿀벌을 키우는 사람만 맛볼 수 있습니다.
매화나무는 겨울의 저격수입니다. 설중매로 눈 속에 숨어 있다가 겨울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총알 대신에 꽃알을 쏩니다. 백발백중 급소에 꽂히고 나면 기관꽃알로 난사합니다. 다윗의 물맷돌이 이마에 박혀 죽은 골리앗처럼 앞으로 꼬꾸라져 죽습니다. 황망한 겨울의 말로입니다. 어제 SNS에 올린《매화 꽃알》입니다.
겨울의 일은 겨울엔 모른다
봄이 오면 모든 게 드러난다
매화 첫 꽃알이 이마에 박히고
연이은 기관꽃알에 골리앗은
벌렁 나자빠져 숨이 끊긴다
겨울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었다
일년 중에 나는 지금 이맘때를 가장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뭉떵거려서 이 시기를 봄이라 부릅니다. 제일 좋아하는 꽃, 매화가 피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봄의 시작을 매화가 피는 그날로 못박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나보다 더 매화를 사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넘버원은 퇴계 이황 선생입니다. 그는 너무 사랑해서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불렀습니다.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줘라’였다고 하니 그분의 매화사랑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퇴계 이황은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입니다. 늘 사용하면서도 무심히 넘겼기 때문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천원권 앞면에 보면 퇴계 이황, 명륜당 그리고 매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매화를 혹독하리만큼 사랑한다’고 했던 선생은 사군자중 난초, 국화, 대나무는 좋아했지만, 특별히 매화는 사랑했습니다. 선생은 평생에 걸쳐 매화를 주제로 시를 읊었고, 그 가운데 91수를 엮어 ‘매화시첩’을 남겼습니다.
매화를 사랑한 두번째 위인은 단원 김홍도입니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그림값으로 삼천냥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일천냥은 종이와 물감을 사고 이천냥으로는 그동안 늘 갖고 싶었던 매화나무를 사서 마당에 심고 엄청 좋아했다고 합니다. 봄마다 매화를 즐겼을 그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김홍도의 '백매(白梅)'는 어쩌면 그 매화를 그린 그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시기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정조가 승하한 뒤에 김홍도는 생계가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그는 인생의 그 겨울을 이 매화를 보고 견뎠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수화 김환기 화백입니다. 김환기 선생은 “내 예술의 모든 것은 달항아리에서 나왔다”는 이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림 판 돈으로 달항아리를 사서 모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초창기에 매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특별히 백자와
달항아리에 큰 애착을 가졌습니다. 1950년대에는 매화와 달, 백자와 달항아리를 집중적으로 그렸습니다. 아마도 성북동 우물에 숨겨두고 피난 갔다 돌아왔을 때 폭격맞아 다 깨진 달항아리에 몰입한 것이 아닐까요? 말년에 그린 그의 그림에는 달항아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게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1970년 1월 27일 김환기 일기 중에서 -
수화(樹話)는 김환기 화백의 아호입니다. 수화(樹話)의 의미는 나무들의 이야기입니다. 아호의 그 나무가 매화가 아니었을까요? 그의 그림에는 매화와 달항아리가 오버랩되면서 선과 점이 이어집니다.
김환기 화백이 1971년에 그린 대작(254×202cm)《우주》는 132억원이라는 경매가로 한국 작가 중에서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일찌기 그가 발견했던 아름다움을, 즐겨 그렸던 조선의 달항아리는 이제 세계인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달항아리는 지난 3월 18일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1억원에 낙찰된 18세기 조선 달항아리입니다. 낙찰가는 당초 추정가 약 26억~36억원을 크게 웃돌았습니다. 구매자는 미국인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두번째 고가로 낙찰된 이 달항아리는 높이 45cm에 몸체지름도 45㎝입니다. 이 달항아리는 높이와 폭이 거의 같은 이상적인 형태로, 유약의 발색이 뛰어나고 보존 상태도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매화를 깊이 사랑했던 퇴계 이황선생과 단원 김홍도. 매화와 달항아리를 사랑했던 수화 김환기. 나는 그분들의 바톤을 이어받아 달리고 있습니다. 18년째 소나무 매화 수목원을 만들고 있습니다. 작년 봄에 수령 40년이 넘은 매화나무 200주를 강정해서 산으로 옮겼습니다. 지금 매화가 막터져 무릉매원이 되고 있습니다.
아래의 시는 10년 전 봄에 매화나무 전지를 하다 쓴 시입니다. 세분의 매화사랑에는 비할 수 없으나, 나의 매화사랑도 깊숙이 들어 갑니다. 사실 이 매화사랑 덕분에 달항아리를 만난 것이지요. 매화와 달항아리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수화 김환기 화백과 결이 같습니다. 그는 달항아리란 이름을 붙이고 달항아리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는 달항아리 각각에 개별적인 이름을 달아주고 달항아리 박물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매화정》
사람 마음을 홀리는
매화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
살랑이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화사한 꽃잎 위에 있나?
떨어뜨린 향유병 깨져 퍼지는
은은한 향기 속에 있나?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홀리나?
화사했다 쉬~ 지는 꽃잎도 아니요
눈 감으면 천상의 내음이지만
눈 뜨면 사라지는 향기도 아니다
한겨울 찍어 누르는 더 큰 힘
맹추위 윽박지름에도 굴하지 않고
맨얼굴로 견디어 내는 힘에
홀딱 반하는 것이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억압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 모습에
완전 까무러치는 것이다
매화 마음이 매화다움을 만들었다
땅에 뿌리를 박고도 하늘과 통하는
정결하고 거짓 없이 순수한 우물에
내 마음도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화사한 매화 꽃잎 봄바람에 날아가고
뿜어져 나온 향기 사라지기까지
매화정에서 허우적대고 싶어라
매화와 달항아리는 한국 문화의 심볼입니다. 차별적 아름다움이 합쳐져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매화는 겨울을 이기고 첫꽃을 피웁니다. 그 강인함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달항아리는 풍만한 곡선에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불완전의 완전성이 달멍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 둘의 만남은 단순한 자연의 조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깊은 뿌리와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매화가 피는 그 순간이 봄입니다. 달항아리는 비어 있는 충만입니다.
매화의 향기와 달항아리의 선이 수화가 추구했던 우리문화의 정체성입니다. 매화와 달항아리는 서로의 보완재이자 또한 한몸입니다.
지금은 도처에서 매화가 만개하고 있습니다. 달항아리는 세계인들이 마음에 만개하고 있습니다. 그 매화정에서 나는 행복하게 허우적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