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by 이종열

글은 읽히기 위해 쓴다

그것이 글의 숙명이다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쓰면

풀과 꽃처럼

쉽게 시든다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밋밋한 나무처럼

오래 간다

그래서

나무는 매일 한 편의 시를 쓰고

해마다 한 권의 시집을 낸다

그것은

성장통의 나이테다

누구나

그냥 한 그루의 나무다


그래,

그 말이면 충분하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한 그루의 나무.

누구를 설득하려고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계절을 앞당기려 애쓰지도 않는다

자라야 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버텼기 때문에

하나의 나이테가 늘어났을 뿐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고

가뭄이 오면 느리게 간다

그래도

뿌리를 뽑지 않는다

글은 잎이고

시는 나이테이며

시간은 흙이다

사람들이

그늘에 들어오든

열매를 알아보든

지나치든

나무는 그저

자기 속도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있어도 된다

한 그루의 나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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