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서 마주한 대한제국의 시간

by Jihye

덕수궁 소개​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으로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났으며,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원화가 진행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규모가 대폭 축소되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덕수궁 전경(카페 정동전망대에서)


대한문(大漢門)
대한문-덕수궁의 정문이 된 동쪽 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1906년 문을 수리하면서 바꾸게 되었다. 원래 대한문은 약 33m 앞에 있었으나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함녕전(咸寧殿)
함녕전-고종이 마지막으로 머문 침전

함녕전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화전(中和殿)
중화전-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중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다. 그러나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다른 정전의 답도와 다르게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에 지어진 건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좌)중화전 내부 모습, (우)중화전 답도
중화문과 중화전


석어당(昔御堂)
석어당-나무 빛깔의 건물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즉조당(卽阼堂)과 준명당(浚眀堂)
즉조당과 중명당-고종의 마음이 담긴 장소

'즉조’는 ‘왕의 즉위’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올랐고, 대한제국 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가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렸다. 이후에는 고종의 후궁인 황귀비 엄씨가 생활하다가 1911년에 세상을 떠난 곳이다.
준명당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즉조당과 함께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복원하였다. 1916년에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관헌(靜觀軒)
정관헌-고요하게 덕수궁을 바라보다.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전통식 지붕에 서양식 기둥이 접목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건물이다. 본래 정관헌 안쪽은 벽돌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금은 정면과 양옆의 벽면이 트여 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철제 난간 위로 이어진 나무 기둥은 몸통에는 매끈하게 홈이 파여 있고, 맨 윗부분에는 화려한 아칸서스 잎 모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이파리 위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그 위로는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화병이 조각되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이어진 위쪽에는 초록 이파리 사이로 모란과 국화, 박쥐와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정관헌 철제 난간 세부 모습

금빛 철제 난간에는 다양한 동물과 식물이 그려져 있는데, 복을 상징하는 박쥐, 장수를 장식하는 사슴과 소나무, 황제를 상징하는 용 등이 있다.


석조전(石造殿)
석조전-덕수궁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서양식 석조 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보여주기 위해 지어졌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층은 시종이 거주하는 방과 부속 시설이 있었고,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서재, 거실 등이 있었다.
1910년에 준공된 후 고관 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석조전에서 보면 서쪽에 비슷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이왕가미술관으로 쓰기 위해 일제가 새로 지은 건물인데,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해설관람


돈덕전(惇德殿)
돈덕전-대한제국의 영빈관이 전시 공간으로

돈덕전은 1902년~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은 ‘덕이 도탑다’라는 뜻이다. 돈덕전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을 본떠 만들었다. 붉은 8빛과 회색빛이 나는 화려한 벽돌로 지어졌으며, 옥빛으로 칠한 윗부분은 아치형으로 만들고 곳곳에 오얏꽃 문양을 장식하였다.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1907년 순종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돈덕전은 고종이 세상을 떠난 뒤 훼손되기 시작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그러다 내부 모습이 담긴 평면도가 발견돼 최대한 원래 모습에 가깝게 다시 지을 수 있었다. 2023년에 새로 문을 연 돈덕전은 다양한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쿠키런: 사라진 국가유산을 찾아서


중명전(重眀殿)
중명전-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라는 뜻으로,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후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불렸다. 1904년 대화재로 고종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편전 겸 접견소로 이용하였다.
이곳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서 활용하다가 2009년에 복원공사하여 2010년에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중명전 내부 전시 모습

'고종의 길'을 걸으며 대한제국의 시간을 상상해 보았다. 덕수궁은 화려한 궁궐이라기보다 대한제국의 시작과 끝을 함께 품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다.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세운 대한문. 그러나 그 뜻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일본의 강압 속에서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순종이 그 뒤를 이었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위해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이 높고 오래 사시라’는 바람이 담긴 이름이었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지라도,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남긴 마지막 예의처럼 느껴졌다.

대한문 앞에 서니 1919년의 장면이 떠올랐다. 고종의 장례 행렬이 이 문을 지나가던 날,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슬픔은 곧 분노가 되었고, 그 감정은 결국 3·1운동으로 이어졌다. 한 궁궐의 문이 역사의 큰 물결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중화전의 이름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겠다는 대한제국의 의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다짐과 달리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향한 의지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고급스러운 식기 세트와 식탁, 탁자와 의자, 침대 등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금빛 곤룡포를 입은 황제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종은 이 건물을 황제로서 하루도 사용하지 못했다. 완공되기도 전에 강제로 퇴위했기 때문이다. 영친왕이 잠시 머물렀을 뿐, 황실 가족이 이곳에서 오래 생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쓸쓸하게 다가왔다. 화려함 속에 남겨진 공백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고 할까.
함녕전은 더욱 조용했다. 고종이 마지막으로 머물며 생을 마감한 곳. 대한제국의 꿈을 품었던 황제가 결국 이곳에서 삶을 마쳤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대한제국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꿈을 품었던 사람들의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곳을 방문한 내가 한 나라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간절함을 느꼈으니 말이다.


덕수궁은 단순한 궁궐이 아니라 한 나라가 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마음이 머물러 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덕수궁은 그 시간과 마음을 조용히 기억하고 있다.

고종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