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의 역사 인천 차이나타운이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생겨나게 된 때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인 임오군란(壬午軍亂). 청나라 군대가 이 난을 제압하기 위해 인천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이때 청나라 군대와 함께 40여 명의 청나라 상인들이 들어와 조선 상인들과 무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1883년 인천의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국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현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중국인들이 이주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화교(華僑)들은 잡화점과 중국 음식을 파는 식당, 주택 등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나갔다.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와 음식점 및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 불렸다. 화교들은 특유의 상술을 발휘하여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들여오고 인천에서 건어물과 해삼, 새우 살, 조갯살 등 해산물을 갖고 나갔다. 상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공화춘, 중화루, 동화루 같은 유명한 청요릿집이 개점하는 등 매우 번창하여 1920년대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은 거의 마비되고 일부 요릿집과 잡화상들만 남게 된다. 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활동을 제약받던 화교들은 본국으로 떠나갔으며, 남은 화교들은 식당과 잡화점을 운영하거나 농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화교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차이나타운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 사회는 위축되었다. 더구나 한국전쟁까지 겪으며 이곳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한중수교와 인천국제공항 개항을 계기로 조금씩 상권이 되살아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관광쇼핑, 특화점, 문화지구, 예술의 거리 등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1. 중화가(1패루)
(좌)중화가와 차아니타운 거리, (우)중화가와 인천역
패루(牌樓)는 붉은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중국식 전통 대문이다. 예부터 중국인들이 동네 입구에 세웠던 마을의 대문 같은 것으로 귀신을 쫓고 상가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디. 차이나타운에는 모두 4개의 패루가 있는데 중심 대문 격인 패루는 인천역 건너편에 있는 중화가(中華街)이다. 중화가는 말 그대로 중국인 마을을 뜻하며, 이 문을 지나 거리 안쪽으로 들어서면 중국 간판과 상점들로 북적이는 차이나타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 짜장면 박물관
짜장면 박물관 외부 전경
개항 후 인천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가 설정되고, 청관 거리가 조성되었다. 당시 청관 거리는 유명한 청나라 음식점이 많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공화춘이다. 공화춘은 ‘공화국 원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로 1912년 문을 열었고, 이곳에서 처음 짜장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짜장면 박물관은 공화춘을 개조해 짜장면의 역사와 문화 등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조성하였다. 짜장면의 탄생 배경에는 산둥 지역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coolie)들이 있다. 개항 후 인천 부둣가의 짐꾼과 인력거꾼으로 고용된 그들은 별다른 재료 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자장면(炸醬麵, zhajiangmian)을 먹었다. 이들을 상대로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 짜장면'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이후 짜장면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중식 요리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현재에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짜장면 내부 모습
3.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租界-개항 지역 인근에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 조계가 설정된 경계 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었다. 좌측으로는 청국, 우측으로는 일본의 조계지가 위치하였으며,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들어서 있었다. 각국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서 설정한 조계지는 현재의 대사관과 유사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토를 타국에게 내어준 슬픈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을 보고 있자니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올라온다. '개항을 통한 근대 역사의 흔적임을 기억하자' 되새기며 돌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니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거리, 인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국 조계지, 지금은 차이나타운
일본 조계지, 지금은 개항장 거리
4. 舊) 인천부 청사
인천 개항 후 가장 먼저 영사관을 설치한 일본은 전용 주거지인 조계지 내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1883년 일본영사관을 준공하였다. 1906년 이사청(理事廳-통감부의 지방 기관)이 설치되자 청사로 사용되었고,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는 인천부청사로 사용되었다. 1933년 지상 2층으로 신축되었는데 증기난방과 수세식 화장실 등 당시로서는 최신 설비를 갖추었다. 광복 후 인천시청으로 사용하다가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1985년부터 중구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열일하는 중구청
5. 홍예문(虹霓門)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의미의 홍예문은 제물포항에서 경인 철도 축현역(현재의 동인천역) 쪽을 관통하는 문으로, 1908년 일본의 공병대가 일본 조계지 확장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해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구멍이 뚫린 문이라는 의미로 아나몽(穴文)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은 이 문을 통해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인 거주지를 조선인 마을까지 확장하고 물자 수송의 편리함도 도모하였다. 홍예문은 화강암을 쌓아 폭 4.5m, 너비 13m, 통과 길이 8.9m로 만들어졌다. 공사 과정에서 흙을 실어 나르던 50여 명의 인부들이 흙더미와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공사가 예상 밖의 난관에 부딪혀 공사비가 불어나자 비용을 조선 정부에 떠넘기기도 했다. 홍예문을 통과하여 폭이 좁은 2차선 도로를 지나자 자유공원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홍예문 위쪽 길에 서니 인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을 알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일제 침략의 역사를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자유공원 입구에서 찍은 홍예문
홍예문 위쪽 길에서 바라본 인천항
인천의 상징과도 같은 차이나타운. 부산, 대구 등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이곳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넓은 데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중국 음식인 짜장면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서울 인근에 거주하는 가정이라면 주말 나들이로 장소로 차이나타운과 동화마을을 검색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서울시민으로 살던 시절, 어린 남매들과 이곳을 처음 방문한 기억이 떠오른다. 볼거리, 먹을거리, 놀 거리, 그리고 사람들로 가득했던 활력 넘치는 거리. 얼마 전 인천 시민이 된 나에게 이곳은 '이번 주는 어디 가지?'라는 주말 나들이 고민을 해결해 주는 장소이다. 공갈빵과 탕후루, 동화마을의 귀여운 그림들, 화려한 장식품은 언제나 아이들을 만족시켜 준다. 자주 가서 보니 스쳐 지나갔으나 의미 있는 역사적 장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래됐으나 새로운 인천. 그 매력을 알아가는 진짜 인천 시민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