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도시역사 및 발전 과정을 보여주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8월 인천의 도시계획 역사를 전시하는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다. 그 해 10월 ‘컴팩스마트시티’로 관명을 변경하여 운영해 오던 중, 2014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인수되었다. 2017년 ‘인천도시역사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인천의 도시역사 및 발전 과정을 다양한 자료와 모형을 통해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1층 근대도시관은 1883년 제물포 개항에서부터 1945년 광복까지 근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개항도시, 제물포
1883년 조선 정부는 인천도호부의 작은 포구 제물포를 개항했다. 조선 정부는 출입국 사무와 개항장의 질서 유지를 위해 인천항감리서를 설치하고, 감리서 서쪽 해안에 이르는 땅을 각국조계지로 설정했다. 조계지 동쪽, 감리서가 있던 내동 중심에는 조선 정부의 관공서와 은행, 객주 상점이 들어섰다. 한적한 어촌 마을 제물포는 개항을 기점으로 근대 도시로 변모해 갔다.
▶그들만의 공간, 조계(租界)
조계는 개항장의 특정 지역에 외국인 전용 거주 공간을 정하여 그곳의 행정권을 그들에게 위임하는 제도를 말한다. 인천에는 일본, 청국의 전관 조계와 양국을 포함해 영국, 미국, 독일 등 다섯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던 공동 조계가 있었다. 1883년 조선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조영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외국인은 조계로부터 10리 이내의 잡거지에서 토지와 가옥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은 각 나라의 조계 안에서 거주할 수 없었고, 어떠한 상업행위도 할 수 없었다.
▶감리서의 폐지와 인천이사청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1906년 2월 일본영사관을 대신할 이사청을 신설하고, 감리가 관장하던 외국인 출입 사무를 이사청으로 이관시켰다. 그해 9월 대한제국 정부는 인천을 비롯한 개항장과 개시장의 감리서를 폐지했고, 감리는 부윤이 되어 그 지방의 행정 업무만을 관장했다.
▶‘진센(Jinsen)’과 인천, 도시의 양면
한일병합 후 일본은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확대 개편하고 본격적인 식민 통치에 들어갔다. 인천은 일본어 발음 그대로 ‘진센(Jinsen)’이 되어 일본의 식민도시로 변모해 갔고, 일본은 인천을 화려한 근대 도시로 치장하여 조선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식민도시의 산업
한일병합을 전후해서 일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일본 자본은 인천에 정미 공장과 양조 공장을 비롯해 성냥, 비누, 간장, 등 생활 용품을 생산하고 크고 작은 공장을 건설했고, 인천은 점차 산업도시로 변모해 갔다.
▶군수공업 도시, 인천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였다. 인천의 도시 영역을 확대하여 기존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하였다. 인천은 식민도시에서 이제 일본의 전쟁 수행에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군수공업 도시로 변해갔다.
▶인천의 병참 기지화
두 차례에 걸친 도시계획으로 공장 부지가 확보되면서 인천에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다양한 공장이 건설되었다. 공장 주변으로 노동자를 위한 집합 주택과 사택들이 들어서 인천의 모습은 점차 군수 도시로 변해갔다. 수인철도가 개통되자 경기 내륙 지역에서 생산되는 미곡은 군수미가 되어 인천항을 통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전쟁터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인천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생산, 집하해서 수송하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되었다. 개항 이후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근대 도시 인천은 전쟁에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통제된 사회, 획일화된 도시가 되었다.
2층 인천모형관은 모형을 통해 인천 시내, 강화, 영종의 전경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으며, 현재 인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층과 3층의 기획전시실과 어린이전시실에서는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이해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기획전시실에서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국내 자동차 산업의 출발이자 중심지였던 인천 부평의 자동차 40년의 역사를 살펴보는 <인천자동차 40년, My car로의 여정> 전이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 작년 겨울방학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은 지금 도시의 모습과 비교하고 체험하면서 즐거워해 뿌듯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인천도시역사관을 관람하며 이곳의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1876년 개항 이후에 형성된 물질자료를 대상으로 해 낯설기도 하고 특별해 보이는 자료들. 우리가 흔히 박물관에서 접하는 토기, 자기, 석기 등의 고고유물과는 형식도, 내용도 달라 보이는 근·현대의 유물들. 이것들을 과연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저 유물을 통해 유물 담당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도 있을 듯하다.
센트럴파크 뷰가 보이는 공간에서 공정무역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의 유물들을 떠올려보았다. 근대전시관에서 본 호적표와 토지문서 등의 각종 문서, 각국조계석, 인천전환국 주조 동전과 전화기, 공출 사발, 양조회사의 술통과 정미소의 쌀포대, 수인선 협궤선로 부속품 등의 유물은 개항기 인천의 모습과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보여주며, 도시와 산업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인천 근대사와 도시의 발전 과정을 조명할 수 있기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굴기관에서 일하며 유물의 명칭, 특징, 상태 등의 유물정보를 정확히 기록해야 전시, 연구, 교육 등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었다. 이는 고고유물뿐만 아니라 근·현대 유물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연구가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져 어색하고 낯설 뿐. 근·현대 유물은 우리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직한 물건이기에 특별하고 의미가 있다. 또한 기증자의 기억과 흔적을 저장하고, 유물에 대한 전문성과 열정을 갖춘 연구자의 손을 거쳐 관람객들을 만난다.
3년 전, 인천으로 이사 온 후 인천의 상징과도 같은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을 방문했었다. 전 직장이 동인천역에 위치해 점심시간에 직장 주변을 산책하며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극장인 애관극장, 일제 침략의 역사를 묵묵히 전해주고 있는 무지개처럼 생긴 터널인 홍예문 등 근대 유적들을 방문하고 기록했었다. 우리 땅에 남의 나라 사람들이 마음대로 사용했던 흔적이 아픈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국적인 매력을 지닌 인천의 명소들이 되었다.
이곳을 방문하며 또 느꼈다. 오래됐으나 새로운 인천의 모습을. 그 매력을 인천시민들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알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