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 관람정보 *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경복궁역 5번 출구, 광화문역 2번 출구)
▪︎관람시간: 월/수~일요일 09:00~18:00
(휴궁일: 매주 화요일)
▪︎관람료: 성인 3,000원, 만 65세 이상/만 24세 이하 무료 (4대궁 및 종묘 통합관람권 6,000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해설관람 시간과 주차장은 홈페이지 참고
경복궁(景福宮)은 1392년 조선 건국 후 1395(태조 4)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이다.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정도전이 지은 ‘경복’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못하다가 270여 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다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광화’는 '빛이 널리 비춘다’라는 뜻이다. 광화문은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은 왕이, 좌우의 홍예문은 왕세자와 신하들이 각각 출입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68년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하였다. 2023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전차의 선로를 설치하면서 훼손되었던 광화문의 월대를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해치: 나쁜 짓을 한 사람을 뿔로 받아 버리거나 물어 버린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용감하고 정의롭게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안다고 하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조사하는 조선시대 사헌부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광화문 앞으로, 그리고 광화문 앞 도로를 넓히면서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해태’라고도 한다.
흥례문은 경복궁의 중문으로 ‘흥례’는 ‘예를 일으킨다’라는 뜻이다. 원래 흥례문의 이름은 ‘홍례문’이었으나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가,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후 2001년에 복원하였다.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위로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영제교는 세종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때도 훼손이 없었고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보수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흥례문과 같이 철거되었다가 2001년에 복원하였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이란 ‘천하의 일을 부지런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나랏일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경복궁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추었으며,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근정전에서는 정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가 왕위에 올랐으며,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근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867년(고종 4)에 중건한 것이다.
근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정 1품부터 정 9품까지의 품계석을 놓았다.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4신상과 12지신상을 포함하여 28수 별자리상 등을 간결하지만 재치 있게 조각하였다.
*차일 고리: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인 차일(遮日)은 조정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비나 햇볕을 막기 위한 천막을 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 쇠고리에 굵은 줄을 묶어 천막을 고정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드므(드무): 방화수를 담아 놓는 그릇. 화마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화마는 너무 험상궂게 생겨서 불내러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사정전의 ‘사정’은 ‘선정을 깊이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업무 보고와 회의, 경연 등이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근정전과 같이 왕의 자리인 어좌가 있고, 그 뒤로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다.
수정전의 ‘수정’은 ‘정치를 잘 수행하다’라는 뜻으로, 고종 때 편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세종 때에는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이곳에 있었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일본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었다.
경회루의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경복궁 침전 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그 밖에 과거시험이라든가 기우제 등이 실행되기도 하였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새로 만들고 누각도 크게 지었다. 성종과 연산군 대에 수리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에 중건하였다.
경회루의 1층은 48개(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 각 24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이 있다.
교태전과 함께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이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강녕’은 ‘편안하고 건강하다’라는 뜻이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편안히 만나 국정 현안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가 있고,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다.
1917년 창덕궁에 대화재가 나면서 창덕궁의 침전(대조전과 희정당 등)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옮겨다가 희정당 복원에 사용되었고,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강녕전 주변으로는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응지당(膺祉堂), 연길당(延吉堂) 등 강녕전 부속건물이 있다.
*취두와 용두: 용마루 양쪽 끝에 얹히는 조형물로 취두는 새 머리 모양이고 용두는 용의 머리를 무섭게 형상화하고 있다. 모두 길상과 벽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잡상: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를 본떠 만든 흙 인형. 지붕 위의 잡상은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을 보호해 준다는 수호신이다.
*토수: 처마 모서리의 사래 끝에 끼는 장식기와.
교태전은 강녕전과 함께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교태’는 ‘천지,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루다’라는 뜻이며, 궁궐의 가장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중궁전이라고도 부른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고 내부 모습은 비슷하나, 건물 앞에 월대는 없다.
1440년(세종 22)경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다. 1917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이 소실되자 교태전을 옮겨다가 대조전 복원에 사용하였고, 지금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하였다.
교태전 뒤로 아미산이라는 왕비를 위한 후원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계단식 화단[花階]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연결된 굴뚝이 아름답다. 굴뚝은 4개가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박쥐, 봉황, 사군자, 십장생 등의 무늬를 새겨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계단식 정원은 산을, 함월지와 낙화담 돌함지는 호수를, 굴뚝의 무늬는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상징하여 아미산 정원은 신선이 사는 자연의 세계를 상징한다.
마치 자연을 옮겨다 놓은 듯한 이런 여러 가지 장치들은 궁궐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왕비에게 갇혀 사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자경전의 ‘자경’은 ‘어머니의 복을 누린다’라는 뜻으로,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황후 조씨)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대비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에는 온돌방을 많이 마련했는데, 각 방들과 연결된 8개의 연도를 모아 북쪽 담장에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 정면 가운데는 해, 산, 물, 돌, 구름, 학, 소나무, 사슴, 거북, 불로초의 십장생 무늬를 넣었고, 그 위아래로는 학, 나티, 불가사리를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굴뚝으로서의 실용적인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향원정의 ‘향원’은 ‘향이 멀리 간다’라는 뜻으로, 원래 이곳에는 세조 대에 세운 취로정이 있었다. 그러다가 1873년(고종 10)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향원지)을 파서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2층의 육모지붕의 형태로 지었다. 이곳은 왕이나 왕비 또는 왕실 가족이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사색을 하는 곳으로, 고종이 명성황후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향원정을 가기 위해 지은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라는 뜻에 취향교(醉香橋)라고 불렀다. 원래 취향교는 무지개 모양의 흰색 다리로 조성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는데 향원정 남쪽으로 복원되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향원정 보수공사 때 취향교는 원래의 자리로 복원하였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에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 안의 궁이다. ‘건청’은 ‘하늘은 맑다’라는 뜻으로,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종은 이곳에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소신껏 나랏일을 돌보고자 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10년 정도 생활하였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곤녕합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1909년(융희 3)에 철거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미술관이 들어섰다가 철거된 후, 200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집옥재의 ‘집옥’은 ‘옥처럼 귀한 보배를 모으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1891년(고종 28)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 등을 옮겨 지은 것으로, 고종의 서재와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집옥재는 경복궁의 다른 전각과 달리 청나라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집옥재 좌·우에는 팔우정(八隅亭)과 협길당(協吉堂)이 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집옥재는 경복궁의 전각 중 유일하게 현판이 세로형으로 되어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경복궁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광화문 월대에서 거행되는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기 귀해, 근정전의 위엄과 경회루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한국 여행의 필수 코스인 듯, 형형색색의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이 ‘조선의 으뜸 궁궐’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차올라 뿌듯했다. 그리고 사뭇 궁금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궁궐을 거닐까?, 유럽의 궁전과 어떤 점이 다르다고 느낄까?
우리가 자금성, 베르사유궁전, 오스트리아 빈 왕궁, 헝가리의 부다 왕궁 앞에서 느낀 감정과 똑같은 맥락에서 외국인들은 경복궁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만만치 않은 저력과 현재적 삶의 역사적 뿌리를 보게 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120p
우리 역사의 만만치 않은 저력과 현재적 삶의 뿌리를 볼 수 있는 경복궁. 한국인인 우리부터 그것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유홍준 교수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니, K-culture의 밑거름이 된 역사적 유산들을 살펴보고 들여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