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역사
조선시대의 청계천-개천(開川)이라 불리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양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한양정도(漢陽定都) 이후 청계천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하게 되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본격적인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1411년(태종 11)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다음 해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여 광통교, 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세종 때에는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설치하여 홍수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 후 영조 때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양쪽 제방에 돌을 쌓아 튼튼하게 하고, 구불구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잡았다. 또한 양안(兩岸)에 버드나무를 심어 큰비가 올 때도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1773년(영조 49) 준천의 역사가 끝나자 영조는 왕세손(후에 정조)과 함께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살펴본 후, 역부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한편 영조가 큰 공사를 시작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생계를 위해 도성으로 몰려든 5만여 명을 고용하여 공사를 했다. 요즘의 공공사업과 같은 것을 영조는 이미 실시한 것이다.
이후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도 준설 공사는 계속되었다. 청계천은 서울 시내를 관통하며, 생활 오수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보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청계천-개천에서 청계천으로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에 개천을 청계천(淸溪川)으로 고쳐 부르고, 청계천을 기준으로 도시정비 사업을 시행하였다. 청계천은 '민족의 거리 종로'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本町]'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 되었다. 청계천 북쪽인 종로는 우리 민족의 거리로 정비되지 않은 반면, 청계천 남쪽은 일본인들의 마을이 되어갔다. 도로를 넓히고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은 대부분 청계천 남쪽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1918년경부터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청계천과 일부 지천에 대하여 바닥을 준설하고 양안에 석축을 새로 쌓았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나아가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일본의 청계천 정비로 인하여 청계천의 다리들은 많이 파괴되었다. 광통교는 다리 옆에 전차선이 놓이게 되었으며 다리는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그 모습이 망가졌다. 도성 밖으로 청계천 물이 빠져나갔던 오간수문은 1907년 완전히 헐리었고, 대신 차로와 전차선로 겸용 다리가 놓였다. 하량교, 영도교 등 일부 다리는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해방 후의 청계천-복개와 복원이 이루어지다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잣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생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 중 많은 사람이 청계천 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 위에 떠 있는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고,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는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어렵던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복개(覆蓋)'였다. 청계천 위로 고가도로를 건설하여 그 모습을 가리는 것이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잣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시원하게 뚫린 고가도로 위에는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반면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훼손되었다.
1990년대 후반 성장과 개발 대신 생태환경과 역사 문화의 보전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면서 청계천을 되살리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3여 년의 복원 사업의 준비를 거쳐 2005년, 지난 50년간 덮여있던 청계천이 다시 열려 '복개(復開)'되었다. 서울의 새로운 역사적, 문화적 공간으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도심의 쉼터로, 과거의 역사와 근·현대 역사의 흔적들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지금도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청계천의 다리들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으므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런 만큼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다.
청계광장의 첫 번째 다리, 모전교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隅廛)'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가 모전 부근에 있어서 모전교라고 불리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청계천을 태평로부터 무교동 사거리 지점까지 복개하면서 없애버렸다.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현재 자리에 복원하였으며, 청계광장의 첫 번째 다리로 시민들을 만난다.
가장 번화했던 다리, 광통교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 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원래 이름은 '넓게 통하는 다리'라는 뜻의 대광통교였다. 광통교는 원래 흙으로 된 다리였는데 태종 때 큰비로 쓸려가 버리자 돌로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다리의 재료가 된 돌은 태종의 새어머니인 신덕왕후의 능에 있던 장식용 돌이었다고 한다.
광통교는 다른 다리와는 달리 길이보다 폭을 더 넓게 만들었으며, 복원한 다리는 길이가 12.3m, 너비가 14.4m이다. 원래 위치에서 상류 쪽으로 155m 옮겨 복원하여 원래 위치의 다리에는 '광교', 상류에 복원한 다리에는 '광통교'라고 각각 달리 붙였다.
정조의 효심이 깃든, 장통교
장통교 근처에 이르면 다리 아래에 타일로 표현한 옛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라 불리는 『을묘원행정리의궤』의 반차도이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는 1,779명의 사람과 779 필의 말을 그려 놓았다. 그렇다면 타일은 모두 몇 개가 사용되었을까? 4,960장이라니, 놀랍다. 길이 186m, 폭 2.4m 규모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정조는 벽화에서처럼 많은 사람을 데리고 13차례나 화성에 다녀왔다. 이렇게 장통교 아래에 있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에서 정조의 효심과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홍수를 대비하라, 수표교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 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우마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청계천의 물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전태일이 살아있는, 버들다리
버들다리는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이 다리 가운데 아주 큰 은빛 동상 하나가 서 있다. 보통 사람들의 키만 한 상반신의 남자는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온몸을 불사른 22살의 청년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기본적 인권과 노동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삶을 고발한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우리 사회가 노동문제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으며, 민중의 삶과 투쟁이 현대사의 전면으로 부각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사후,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2005년 서울시는 전태일 거리를 조성하고, 청계천 버들다리 내에 전태일 기념 동상과 동판을 설치하였다.
열사도 투사도 아닌 그저 사람을 사랑했던 전태일.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다시 살아난 ‘아름다운 청년’. 그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거리에 서 있으면 전태일이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저 사람을 사랑한 그의 따뜻하고 강한 마음이 우리의 삶에도 전달되길,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던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바란다.
도성 안의 마지막 다리, 오간수교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水門)으로, 이것이 다섯 개 있어서 오간수문이라고 하였다.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다리가 놓였으며, 이때부터 오간수교라고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이곳은 사람들의 통곡과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이 이곳 오간수교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는 이곳 오간수교 주변뿐만 아니라 을지로, 흥인지문(동대문), 청량리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가득 찼다.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던 당시를 그려보면서 청계천 산책을 마무리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의 청계천은 지저분한 얼굴을 씻어내고 맑고 푸르게 단장했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과 빈곤의 상징에서, 60·70년대는 성공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로 상징으로, 80·90년대는 공구, 인쇄, 의류 등 도심 산업의 중심지이자 소음·혼잡·매연 등으로 도시발전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탈바꿈해 이전은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면서 지금은 광장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예술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청계천의 변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시 인구의 증가나 산업 기술의 발달로 이미 만들어진 도시 환경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을 막고, 변화에 계속 적응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도시재생 사업의 좋은 예가 된 청계천. 서울시와 시민들이 힘을 모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시민들의 휴식처와 문화공간이 되도록 잘 관리되길, 인천시민도 바란다.
청계천 왔으니 하이커 그라운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한국 관광을 탐험하는 공간에서 더위도 식히고 재미와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낀 시간이었다. Hi from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