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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그들의 희생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

by Jihye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안내​
▪︎위치: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독립문역 5번 출구에서 209m)​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어른-3000원, 어린이-1000원
▪︎주차: 서대문독립공원주차장, 독립문문화공원주차장
*수학여행 기간(4월~6월) 평일 일반 승용차 주차 불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소개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가 지은 근대식 감옥이다. 190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87년 11월에 폐쇄될 때까지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옥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 형태인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역사의 현장이다.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보안과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 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후 서대문구에서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내도 (출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홈페이지)
망루와 담장, 입구의 철문

길게 늘어선 붉은색 벽돌의 담장과 높게 쌓은 망루, 손을 대면 당장이라도 삐걱대는 소리를 낼 것 같은 철문을 지나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입구가 보인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1,161m(현재는 200m만 복원함) 길이의 담을 쌓고, 10m에 달하는 높은 망루를 세워 감시했던 일본인 간수들. 그 서슬에 눌려 독립에 대한 의지와 활동을 억압받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 무거운 마음으로 입구를 지나 역사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서대문형무소의 업무를 총괄한 보안과청사 건물로 1923년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회의실과 소장실, 지하는 조사실로 사용하였다. 1908년 경성감옥 시기부터 1987년 서울구치소로 사용되기까지, 일제강점기의 서대문형무소의 확장과 항일독립운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통사적 전시 공간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입구

형무소역사실 (1F)
사법제도의 도입과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감옥의 설치와 확장, 1987년 서울구치소로 이전 후 복원 과정 및 기록 영상을 전시하고 있다.

설계도와 건물 모형, 서대문형무소 설계도와 배치도
건물 관련 유물들

민족저항실 Ⅰ/민족저항실 Ⅱ/민족저항실 Ⅲ (2F)
전시관 2층에 있는 민족저항실은 우리 민족이 일본에 저항한 역사를 시대에 따라 전시한 곳이다. 이곳을 둘러보면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의 말기 의병부터 1919년 3·1 운동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항일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민족저항실Ⅰ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
수감도구들(수갑, 요, 족쇄, 용수)

*수감 도구들
수갑: 도망가지 못하도록 채웠던 철제 수갑으로 손목이 쓸려 흉터가 남을 정도로 꼭 조이도록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요: 3m 길이의 쇠사슬에 무게가 5kg이나 되는 쇳덩이가 달린 도구.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에게 일을 시킬 때 도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허리에 채웠다.
족쇄: 수감자 이동이나 노역 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양쪽 발목에 채웠던 형구이다.
용수: 사람들이 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둥근 기구이다. 독립운동가에게는 두려움을 주고 일반인들에게는 독립운동가임을 알지 못하게 하여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씌웠다고 한다.


민족저항실Ⅱ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 5,000여 장을 전시하여 그들을 기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항일 독립운동과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 모형을 전시하고 있는 민족저항실Ⅲ

시신수습실 모형
서대문형무소의 포부가 담긴 글

지하조사실 (지하 1F)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어 조사받고 대기했던 곳이며, 일본 경찰들이 수감자들을 취조했던 공간이다. 이곳은 실제로 고문이 일어났던 지하고문실이다. 일제는 투옥 시킨 독립운동가들을 특별범죄자로 구분해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 감방에 가두었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모질게 고문했다.

물고문, 지하독방
벽관고문
상자고문

중앙사와 옥사

중앙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2층에는 수감자들을 교육시켰던 강당이 있었다. 일본이 이 건물을 세운 이유는 옥사 전체를 한눈에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제10옥사, 제11옥사, 제12옥사와 부채꼴 모양으로 연결되어 옥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런 구조를 파놉티콘(panopticon)이라고 하는데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구조는 감시에는 편리했지만 통풍과 채광에 좋지 않아 수감자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감옥이 비인간적이라 하여 점차 사라졌지만, 식민지였던 조선에는 계속 남겨 두는 비인간적인 통치를 자행했다.

12옥사 외부전경과 내부 모습
형무소 식(食)-틀밥(가다 밥)
시찰공과 패통, 감옥 밖 간수의 시선에서 찍은 시찰공
타벽통보법

*타벽통보법: 수감자들이 감방과 감방 사이의 벽을 두드려 정보를 주고받던 암호통신법


한센병사

한센병에 걸린 수감자를 따로 수용한 건물로 1923년 즈음 지어졌다.


민족의 혼그릇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신 분들과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신 선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추모비이다. 일제에 의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나 일제가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불태웠기 때문에 현재 알려진 165분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민족의 혼그릇
민족의 혼그릇 앞에 깔린 ‘京’자 벽돌

* ‘京’자 벽돌

경성감옥의 수감자를 교육시켜 벽돌 제조에 투입하였다. 당시 시중 벽돌의 1/3 가격으로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민영 벽돌 공장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생산된 벽돌에는 ‘京’자가 찍혀 있었으며 다수가 형무소의 건물을 짓는 데 다시 사용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사형장

사형을 집행했던 곳이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되어 있다.

사형장 외부 모습
통곡의 미루나무

시구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이다. 붕괴되었던 것을 1992년에 독립공원을 만들 때 발굴하여 40m를 복원하였는데 원래 길이는 약 200m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시신을 받아 갈 유족이 없는 경우에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복원된 시구문의 모습

격벽장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던 운동장으로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 운동할 때 대화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격벽을 세워 수감자들을 분리하고 감시했으며, 가운데에 높은 간수 감시대를 세워 손쉽게 수감자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해방 이후 철거되었던 것을 2011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 20m 떨어진 이곳에 본디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간수감시대에서 바라본 격벽장

여옥사

여성 미결수를 가뒀던 곳으로 1979년에 철거되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했다. 일제강점기에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고난을 겪었다. 여옥사 8호 감방은 1920년 3월 1일에 3·1 운동 1주년 옥중 만세 투쟁이 펼쳐졌던 현장이다. 이곳은 특이하게 지하 공간이 있었는데, 유관순이 지하에 갇혔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여성항일독립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옥사 외부 모습
여옥사 내부 전시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의 소개 글이 이곳의 존재 이유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듯하다. 학생들에게 반일감정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기억하자는 방향으로, 독립운동가 자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기에 여기에 온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해주라는 강사님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다.


우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온 이유는 100년 전의 아픔을 통해 오늘을 평화롭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 아닐까? 아픔을 이겨 낸 사람만이 더 큰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듯이 우리나라도 더 큰 대한민국,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길 바라며.
우리가 밟고 있는 한 장 한 장의 붉은 벽돌에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가는 길은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서러움이 어려 있는 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당당히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자랑스러운 길이다.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독립의 밑거름으로 삼았던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웃으며 오늘을 보낼 수 있는 것이리라. 16세의 유관순 열사도 65세의 강우규 의사도,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고 우리말과 우리글로 노래 부르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뿌듯해하지 않을까.

다음 날이 현충일이라 더 의미 있었던 방문이었다. 독립운동은 못 해도 그들을 기억하고 알려줄 수는 있으니, 복잡하고 어려운 독립운동사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할 이유다.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희생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여옥사 내부에 있던 감동적인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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