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은
예술고등학교 디자인과에서 보낸 3년이란 시간은 나에게 색채와 형태의 미학을 탐구하는 더없이 깊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날들을 붓과 도화지, 아이패드 앞에서 씨름하며, 단 하나의 선과 점에도 내 모든 감각과 아이디어를 담아냈다. 그러나 동시에, 완벽한 구도와 조화를 쫒는 과정 속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내게 더욱 선명하게 던졌다. 시각 예술이라는 직관적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어느 순간 ‘일본어’라는 낯선 울림에 강렬히 사로잡혔다.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문화의 숨결은 미지에 세계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일본어학과 진학을 목표로 삼은 나는 예술과 언어를 잇는 다리 위에서 통역사라는 새로운 꿈을 품게 되었다.
이처럼 예술이라는 익숙한 길을 떠나 낯선 언어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나의 불안정한 선택지에서, 웹소설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J-POP은 나만의 ‘일상 속 인문학 교재’이자 고뇌를 해소하는 든든한 위로가 되었다. 특히 ‘회귀물’ 웹소설 속 주인공들이 다시 주어진 시간 속에서 과거의 아픈 선택을 되돌리거나, 후회를 발판 삼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모습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디자인 전공생으로서 쌓아온 경험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부터 벗어나, 일본어학과라는 새로운 길을 택하려는 나의 망설이는 내면 속에서 ‘이 선택이 옳은가?’,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싹틀 때마다, 나는 웹소설 속 인물들의 치열한 고뇌와 그들이 감수하는 선택의 무게를 읽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를 넘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내재된 ‘만약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주어진 환경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나의 삶을 통제하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을 대변하는 듯했다. 웹소설 속 주인공들이 용기 있는 선택으로 운명을 바꾸는 과정은 나에게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지로 길을 개척해야만 나의 정체성이 온전히 완성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주었다.
한편, ‘성장형’ 웹소설과 애니메이션의 인물들은 미숙함과 함께 약점을 안고 시작하지만, 수없이 많은 역경과 고난을 뚫고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아간다. 통역사라는 목표를 향한 일본어 학습은 때때로 나의 부족함과 마주하게끔 했고, 막막함과 좌절감에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주인공 ‘미도리야 이즈쿠’가 계속해서 넘어지고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히어로 길을 닦아나가는 모습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단순히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변과 연대하며 진정한 ‘히어로’로 거듭나는 캐릭터의 성장은, 미숙하더라도 끈질긴 노력을 통해 나만의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는 인문학적 교훈을 던져주었다.
이는 나의 일본어 학습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성장이란 내면의 갈등과 끊임없이 씨름하여 더 나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깨달음을 주었고, 나의 정체성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완벽한 출발이 아니더라도 좋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끊임없는 도정과 과정 그 자체가 성장임을 말이다.
나의 인문학적 성찰은 시각 예술과 언어의 경계를 넘나든다. 디자인 수업 시간 진행했던 북커버 디자인 프로젝트는 단순한 시각 작업 이상의 깊은 사색을 요구했다. 나는 한 권의 책이 독자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어떤 질문을 던질지 고민하며 색채, 서체, 구도 등 모든 요소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이 과정을 통해 언어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를 넘어, 시각적 요소와 결합하여 감각과 정서, 나아가 무의식적인 영역까지도 매개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체험했다. 통역이라는 나의 꿈 또한 단순히 언어를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감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섬세한 맥락까지 함께 공유하고 전달하는 고차원적인 행위임을 깨닫게 했다. 나의 디자인적 안목을 통역사로서 이러한 비언어적 요소들을 읽어내고 전달하는 데 큰 자산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몰입해온 J-POP 역시 나의 인문학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귓가에 울리는 멜로디 속에는 청춘의 불안과 희망, 사회의 단면과 시대의 아픔이 섬세하게 엮여 있었다. 때때로 한 음절 한 음절 곱씹는 가사는 마치 다정한 손길처럼 마음 깊숙한 곳을 어루만지며, 언어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고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했다.
특히 ‘작은 한 걸음이 내일을 바꾼다’는 메시지를 담은 어느 곡의 가사는, 내가 예술고 디자인과로 진로를 변경하려는 용기 있는 ‘한 걸음’이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내일’을 바꿀 수 있는 통역사로서의 역할과 맞닿아 있음을 일깨웠다. 음악 속에서 만난 공감의 힘은 내가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 즉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진정한 소통의 의미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처럼 예술에서 언어로, 디자인과 일본, 그리고 통역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기까지 나의 여정은 단순히 진로를 변경하는 행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탐험하고, 삶의 의미와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나만의 치열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순례였다.
나는 웹소설과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선택을 통해 인간 본성의 다양한 면모를 배우고, J-POP 가사에서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며, 디자인 작업을 통해 세상을 나만의 언어로 해석하는 방법을 익혀왔다. 이 모든 경험들은 획일적인 교과서 속 인문학이 아닌, 내가 숨 쉬는 일상 속에서 피어난 살아있는 지혜이자, 나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벼려낸 강력한 위로였다.
나는 앞으로도 이 다채로운 경험과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언어와 예술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를 섬세하게 연결하는 통역사로 성장하고자 한다. 불안과 번민이 따르더라도, 회귀물의 주인공처럼 스스로의 선택에 용기를 잃지 않고, 성장형 주인공처럼 멈추지 않는 배움의 발걸음을 이어가며, 이 세상의 나만의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역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 이 모든 여정이, 예술고의 붓 끝에서 시작되어 나의 정체성을 완성해나가는 또 다르게 찬란하게 빛나는 디자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