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우리 이제 서른 중반이다."
라고 친구가 통화 중에
내 나이를 실감시켜 주었다.
"진짜네. 우리 진짜 서른 중반이네."
라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벤자민의 시간처럼
우리의 시계도
반대로 흘러갈 순 없을까.
예민한 사춘기 소녀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 중
몇몇은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고,
또 다른 친구들은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며
어느덧 10년 차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커버린 거지
하는 놀라움과 동시에
소름이 끼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징그럽다 정말"
너와 내가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20년을 향해가고 있다.
내 인생의 절반의 시간,
그걸 깨달은 우린
또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20살 때도, 막 30살이 되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우린 울고 웃으며
지지고 볶았던 지난날들의 이야기들을
또다시 시작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미 알고 있는 그 모든 레퍼토리들을
무한 반복하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마치 딥러닝을 마치고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에이아이 로봇들처럼
우리만의 웃음 포인트들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철이 없는데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20년 전 일도 어제 일처럼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고
지금도 우린
서로의 꿈을 묻기도 한다.
시시콜콜 수다 중에
최애 아이돌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이고,
여전히 우린 사춘기 소녀 때처럼
이렇게 가슴이 두근 거리는
아줌마
아니 소녀들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린
20년이란 세월을 물 쓰듯 써버린 것일까.
20년의 세월 동안 변한 것도 있다.
그때에 우린 안주거리 남의 편이 없었고,
지금처럼 뻔뻔스럽게
만족하니 안 하니 같은
이야기들은 하지도 못했다.
19금 영화 이야기만 나와도
귀와 볼이 새빨개져서
서로 어쩔 줄 몰라하며
순진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요즘엔 늘 상 하는 인사말,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라는 말은 할 줄 조차 몰랐던 우린
별 걱정 없는 열일곱 소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이 훌쩍 넘은 우리들은
변화보단 같음에 익숙하다.
나도 너도 그때 그대로이다.
적어도 우리들의 눈에는.
얼굴도 마음도 똑같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희들과 만날 땐
난 그때의 내가 되었고,
너희들도
그때의 네가 되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35살들을 떠올리면
대단한 어른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 그런 어른이라고 하니
아직도 믿기지 않고 어색하기만 하다.
여전히 우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함께 있을 땐 아직도 소녀 같은 우린
17살의 마음을 지닌 한 아이의 엄마 이기도,
누군가의 동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도 그렇게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나 보다.
35살이 되어보니 알 거 같다.
10년 전 내가 우러러보았던 35살의 어른이
사실은 그다지 어른이 아니었단 사실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우린 아직도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
35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