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워싱턴의 눈, 그리고 전자레인지 앞의 행복
워싱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지하철을 탔다.
표를 끊어야 했는데, 이곳은 무임승차가 많은지 개찰구 앞을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승차권을 뽑는 기계 앞에서 트래블카드가 인식되지 않아 한참을 헤맸지만, 다행히 신용카드로 해결했다. 여행에서 이런 작은 ‘통과’ 하나가 은근히 에너지를 가져간다.
역 안은 뜻밖에 신비로웠다.
우주선이나 외계 행성으로 들어가는 터널처럼 보였다. 초콜릿과 같은 모양의 콘크리트 벽돌이 쌓여 터널을 만들고, 선로 위로도 에스컬레이터가 연결되어 있었다. 출입구를 찾는 건 어렵고 복잡했지만, “이건 처음 보는 풍경”이라는 감탄이 먼저 나왔다. 워싱턴의 첫인상은 그렇게—낯설고, 묘하게 멋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 근처 역에 내렸다.
지도상으로는 도보 6분이었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린 날의 6분은 10분이 되고, 캐리어를 끄는 10분은 체감상 20분이 된다. 그날은 미국 동부 전체에 대설주의보가 내려 있었다. 미리 말하자면, 워싱턴에서 보낸 3일의 계획은 이 눈 때문에 대부분 무너졌다. 박물관과 미술관, 여러 프로그램이 취소되거나 문을 닫았다. ‘워싱턴에서 뭘 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우리는 ‘워싱턴에서 무언가를 했다’기보다 ‘워싱턴에서 일단 지냈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섰다.
공간은 작았지만, 이제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포근해 보였다. 침대는 하나였다. 동생과 함께 자야 했지만 내가 체구가 작은 편이라 생각보다 비좁게 느껴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 방에서 꽤 많은 추억을 만들게 된다.
그 호텔에는 라운지에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그게 우리에게는 거의 ‘생존 장비’처럼 느껴졌다.
동생이 한국에서 챙겨 온 음식들을 데워 먹기 위해, 우리는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라운지를 들락거렸다.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시간이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는 일이 이렇게 간절한 일이 될 줄 몰랐다. 햇반을 돌려 방으로 가져와 김자반, 고추장, 고추참치를 비벼 먹었다. 여행 중에도 한국 음식이 그리웠고, 특히 ‘먹는 걸 좋아하는’ 우리 남매에게 입에 맞는 음식을 찾는 건 생각보다 큰 과제였다.
동생은 주방장이 되었고, 나는 조그만 협탁 위를 치웠다. 그리고 아이패드로 우리가 밥 먹으며 볼 프로그램을 틀었다. 동생은 냉장·냉동이 없어도 되는 음식들을 정말 잘 챙겨 왔다. 컵 김치찌개도 있었고, 봉지팩 곱창볶음도 있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햇반에 비벼 먹던 곱창볶음 양념의 맛이다. 8월 중순부터 뉴욕에 머문 뒤, 그렇게 혀를 찌르는 매콤하고 달큰한 소스를 오랜만에 먹었더니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와… 미쳤다.” 한국에서 잘 챙겨 온 동생이 기특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전자레인지를 찾는 길마저 즐거워했다. 이상하게도 그 길이 재밌고 행복했다. 언니 없이 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우리는 서로를 더 의지했고 더 배려했다. 팔짱을 끼진 않았지만 마음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하나의 따뜻한 일이 생겼다.
우리가 매일 전자레인지 앞에 서 있는 걸 자주 보던 투숙객 중 한 명이, 조식 코너에 있던 설탕 코팅 벨기에식 와플을 동생 손에 한가득 쥐여 준 것이다. 우리는 미국식 조식을 신청하지 않았다. 입맛에 맞을 것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방식의 밥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분은 ‘전자레인지 앞에서 기다리는’ 동생을 보고 왠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방에서 밥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주머니에서 빵이 수두루룩 나왔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동생이 라운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밥을 먹고 후식처럼 와플을 먹었다. 신기하게도, 그 와플은 더 맛있었다. 친절이 간식의 맛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 감사함과 소소한 행복이 마음과 배를 동시에 채웠다.
그 호텔에는 샤워실 조명 색을 조절하는 컨트롤러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샤워할 때마다 그걸 가지고 장난을 쳤다. 동생이 “파란색으로 해줘”라고 하면 나는 일부러 계속 색을 바꿨다. 바뀌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서, 나는 손가락으로 색상판을 휙휙 움직였다. 남동생과 있으면 나는 종종 초등학생이 된다.
어릴 때 우리는 함께 등교하던 시절이 있었다.
늦게 출발해 지각할 위기에 놓이면, 등교 길에서 ‘런닝맨 이름표 떼기’ 같은 걸 했다. 실제로 문방구에서 이름표를 사서 붙이고 술래잡기처럼 뛰었다. 동생은 장난이 많아서, 횡단보도 신호가 깜빡일 때 먼저 휙 건너가 버리곤 했다. 나는 뒤에서 따라가다 못 건너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럴 때마다 다음 횡단보도를 노리며 동생과 나란히 평행한 길을 걸었다. 신호가 바뀌는 순간, 나는 동생 쪽으로 달려갔고 동생은 놀라 달아났다. 그때 유행하던 베컴 머리를 하고 뛰어가던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작고 귀엽던 애가, 어느새 나보다 훌쩍 커져 성인이 되었고, 지금은 미국 여행을 함께하고 있다. 시간을 실감하는 순간은 늘 이렇게 갑자기 온다.
워싱턴에서 우리는 계획한 걸 많이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3일은 허무하지 않았다. 눈 때문에 멈춘 도시에서 우리는 더 자주 웃었고, 더 자주 붙어 있었고, 더 자주 ‘같이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오래도록 동생과 유치하고 재밌는 시간을 계속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의 일부에, 이 여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보디가드가 된 내 동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