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 "함께"의 깨달음 2

(7) 예기치 못한, 대설 주의보의 연속

by 윤예진

동생이 나를 깨웠다.


“누나, 일어나 봐. 창밖 봐. 눈 엄청 왔어.”


커튼을 젖히는 순간, 세상이 하얬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가 사라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고, 회색이어야 할 아스팔트는 새하얀 종이처럼 덮여 있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계속 내려왔다. 바람에 날린 눈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미 나 있는 발자국 위로 또 눈이 쌓였다. 사람들은 그 발자국을 따라 “안전한 길”을 골라 걷고 있었다.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내 첫 감정은 단순했다.

“눈 진짜 많이 온다! 와우!”


나는 장갑, 목도리, 마스크, 두꺼운 양말까지 꺼내 착착 챙겼다. 오늘은 링컨 메모리얼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25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다고 구글맵이 말했다. “산책 겸 걸어가자.” 우리는 그렇게 결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택시나 지상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가자 발이 푹푹 빠졌다.

눈이 생각보다 깊었다. 어떤 곳은 발목이 아니라 종아리까지 잠길 만큼 쌓여 있었다. 차도는 아예 기능을 잃었다. 눈 치우는 차가 아침부터 도로를 쓸고 있었고, 사람들이 삽을 들고 눈을 퍼냈지만 눈은 계속 내려서 금세 다시 덮였다. ‘정비의 흔적’이 남기 어려운 날이었다.


우리는 도로인지 인도인지 구분이 안 되는 하얀 바닥을 그냥 ‘길’이라고 생각하고 건넜다. 거리에는 차가 없었고, 도시 전체가 조용했다.


눈 많이 오는 날에는 보통 집 안에 박혀 창밖을 보며 따뜻하게 보내는 게 사람의 본능 같은데, 우리는 워싱턴에서의 ‘진짜 첫날’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동생도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끈을 바짝 당겨 얼굴을 가렸다.



어딜 봐도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었다.

둥근 분수대 위에 둥글게 쌓인 눈은 케이크 시트처럼 폭신해 보였다. 도로 옆으로 치워 둔 눈더미는 어마어마했다. 서울에서도 이렇게까지 눈이 쌓인 풍경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 눈을 보면서, 링컨 메모리얼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다 예상 밖의 ‘난관’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었는데, 계단까진 눈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아래부터는 손도 대지 않은 눈길이었다. 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이 아니라 ‘눈 슬라이드’ 같은 길.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질 것 같았다. 앞사람이 밟아 둔 발자국만 따라가며, 최소한으로 눈과 접촉하겠다는 마음으로 아래만 뚫어져라 봤다.



그 길 위에 강아지 발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노란색 마킹 자국도. 그 순간 웃음이 났다. 이런 날에도 산책은 나오는구나.


나는 양말을 두 겹을 신었다.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눈이 체온에 녹아 양말이 젖으면 발가락부터 얼어붙는다. 그날도 완전히 무사하진 않았지만, 최악은 피했다.


우리는 링컨 메모리얼만 보고 돌아오기 아쉬워, 주변 메모리얼들을 묶어서 걷기로 했다. 가장 먼 제퍼슨 메모리얼부터 시작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메모리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메모리얼,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거쳐 링컨 메모리얼로 가는 동선이었다.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무가 많은 공원 같은 길이 계속 이어졌고, 햇빛은 눈구름에 가려 애초에 보일 생각이 없었다. 옆의 물가(호수)는 살짝 얼어붙었고 주변은 조용하고, 눈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너무나도 조용해 약간 오싹하기는 했으나 설경만은 아름다웠다. 눈밭에 나무 밑동이 파묻히고, 가지 위로 눈이 얹힌 모습은 예술적이었다. 미국에서 보는 진짜 설경. 나무도 한국에서 흔히 보던 소나무와는 달랐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앞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동상들의 형상과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눈이 수북이 쌓여 어깨와 모자 위에 내려앉아 있었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눈은 원래 아름답지만, 어떤 곳에서는 아름다움이 더 조용한 슬픔으로 변한다.


광활한 길을 따라 메모리얼들이 이어지는 걸 보며, 미국이 ‘기리는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꼈다.


눈길을 걷는 건 에너지를 엄청 소비했다. 그래도 나는 ‘이 또한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난생처음, ‘사계절 눈으로 덮인 나라‘에서 여행하는 사람처럼 그 순간을 즐기려 했다. 실제로 그날 사진 속 내 얼굴엔 행복함과 힐링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드디어 링컨 메모리얼에 도착했다.

앞에 길게 고여 있는 풀(pool)은 얼어붙고 그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웅장했고, 위엄이 있었다. 기념관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감탄을 불러왔다. 멀리서부터 걸어오며 옷이 땀에 젖어 있던 동생은 잠깐 옷을 정리하고 다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기념물을 지나 워싱턴 기념탑 쪽으로 걸었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 갈수록 그 탑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높았다. “이 정도 규모로 만들어 두는 게 참 미국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계획은 무너졌다.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도, 자연사 박물관도, 조각 미술관도, 허시혼 뮤지엄도—줄줄이 대설로 휴무였다. 눈앞에서 계획이 하나씩 닫혔다. 우리는 우선 추위에서 숨을 돌리려고 문이 열린 공공건물로 들어가 화장실을 들르고, 의자에 앉아 잠깐 쉬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걸었고, 충분히 했다. 오늘 일정 하나는 성공했으니 이제 욕심내지 말자. 남은 시간은 ‘눈을 즐기는 시간’으로 바꾸자.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짜 신나졌다.

하얀 눈밭에 손가락으로 이름을 쓰고, 뒤로 벌렁 누워 눈천사를 만들고,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 위를 뛰어다니며 푹푹 발자국을 남겼다. 그 발자국이 쌓이는 게 쾌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놀다 보니 산책 나온 사람도 하나둘 보였고, 강아지도 보였다. 아마 이 시기에 워싱턴에 온 많은 관광객들은 호텔에 발이 묶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 방식으로 하루를 굴려 나갔다.



오후 4시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오전 10시 반쯤 나왔는데, 그 짧지 않은 시간을 눈 속에서 보내고 보니 ‘오늘 정말 많이 움직였구나’ 싶었다. 그날 만 보 이상을 걸었고, 눈을 파헤치며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온몸으로 배웠다. 동시에 이렇게 많은 눈을 보고, 그 위를 걷고, 그 속에서 웃은 날은 내 인생에 거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동생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 눈 속을 걷자”라고 계획하고 추진한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런데도 동생은 끝까지 같이 걸어줬고, 같이 웃어줬다. 그날의 워싱턴은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한 대신, 우리 둘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놀며 보낸 하루였다.


방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 따뜻한 공기 속에 앉았을 때,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오늘은—감기만 안 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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