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 "함께"의 깨달음 2

(9) 계획이 무너져도, 친절은 남는다

by 윤예진

버스가 멈춘 날, 택시에 탄 천사


로슬린 역에 도착한 우리는 조지타운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원래라면 곧 도착해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았다. 정류장 전광판에는 분명 버스 번호가 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숫자가 사라지더니 아예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았다. 몇 분을 더 기다려도 상황은 같았다.


“우버 부르자”

동생이 먼저 말했다. 나도 그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옆에 서 있던 현지인처럼 보이는 여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버스 여기서 기다리는 게 맞나요?” 전광판이 고장 난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맞아요. 근데… 오늘은 버스가 운행을 안 하는 것 같네요.”


아, 또 눈이구나.

워싱턴에서 3일째를 보내면서 나는 ‘눈이 모든 걸 멈추게 한다’는 걸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바람을 피하려고 역 쪽으로 조금 들어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분이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시나요? 저는 택시 불렀는데, 다리 건너서 조지타운 쪽 지나가는데 그쪽으로 가는 길이면 같이 타고 가요.”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뭐지…?’ 세상에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내려온 기분이었다. 누가 봐도 우리는 타지인 티가 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망설임 없이 “같이 가자”라고 말했다. 낯선 도시에서 이런 제안을 받는 건, 생각보다 크게 마음을 건드린다. 나는 그 온기가 갑자기 뭉클해서, 목이 잠깐 막혔다.


택시가 도착했고, 그분은 먼저 뒷좌석에 앉아 우리도 타기 좋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나는 감사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비용을 어떻게 보태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마이멜로디 동전지갑에 남아 있는 동전과 지폐 몇 장이라도 드리고 싶어 지갑을 열었는데, 그분은 연이어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라서.”


그리고 기사에게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여기서 내리고, 저는 그다음에 어디로 갈 거예요.”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친절은 돈보다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리고 워싱턴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먼저 내리며 감사 인사를 여러 번 했다.

그분은 끝까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런데 여행자의 마음은, 이런 작은 호의 하나로 갑자기 따뜻해진다. 발끝까지 온기가 도는 느낌. 동생과 나는 내리자마자서부터 그 얘기만 했다. 오늘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투어가 취소된 아쉬움이 컸는데, 이상하게도 그 친절이 그 아쉬움을 조금 덜어주었다. 계획은 무너졌지만, 오늘은 이미 ‘좋은 순간’을 하나 얻었다.


우리는 조지타운의 히스토릭 지구로 들어갔다.



먼저 워터프런트 파크로 향했는데, 그곳도 눈이 수북했다. 내려가는 길은 일부가 빙판이어서,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작은 스릴이 있었다. “워싱턴 진짜 눈 많이 왔구나”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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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있던 내셔널 몰 주변이 박물관과 기념관의 ‘공공’ 풍경이었다면, 조지타운은 ‘사람 사는 동네’였다. 카페와 상점이 이어졌고, 거리에는 비교적 사람이 많았다. 벽돌집들이 서로 바짝 붙어 있는 모습, 빨간 문으로 포인트를 준 집, 모서리를 지키는 키 큰 나무들, 집에 걸려있는 성조기. 밤새 내린 눈이 바닥과 차 위에 얹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차 위의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동네의 겨울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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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대학교로 향했다.

캠퍼스는 올드한 성당처럼 고풍스러웠고, 눈이 깔린 마당 때문에 더 “해리포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건물은 낡은 게 아니라, 역사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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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피하고 배도 채울 겸 우리는 ‘Levain Bakery’에 들렀다.

빵 세 가지와 커피를 하나씩 사고, 햇빛이 비치는 창가 쪽에 앉아 몸을 녹였다. 피넛이 들어간 초콜릿 쿠키는 막 나온 것처럼 따뜻했고, 안은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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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쇼핑거리도 걸었다. 의외로 명품 매장도 있었다.

나는 바지 하나를 샀다. 뉴욕에서 내 ‘소울 청바지’가 초콜릿 얼룩에 절여져 도무지 회복이 안 된 채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의 대부분이 잘 어울려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이제는 보내줘야 했다. 대신 마음에 드는 황토색 바지를 샀다. 사실 갈색 계열 바지를 갖고 싶었던 건 오래된 소원이기도 했다.


저녁은 밖에서 먹기로 했다.

투어도 못 했으니 워싱턴의 마지막 밤을 근사하게 채워보고 싶었다. 마침 당시 화제가 된 에드워 리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워싱턴에 있다는 걸 알고, 예약 가능한 시간대로 잡았다. 시간 전까지 백악관 근처 비지터 센터의 기념품 숍을 잠깐 둘러본 뒤,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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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좋았다.

고풍스러운 조명, 낮은 톤, 테이블이 적당히 채워진 공간. ‘오늘은 제대로 먹겠다’는 마음이 컸다. 우리는 두부 튀김, 치킨, 스테이크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가격도 우리에겐 큰돈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맛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의 입맛에는 기대만큼 맞지 않았다.

고기는 생각보다 레어에 가깝게 느껴졌고, 치킨 소스는 설명과는 다른 방향의 맛이었다. 양도 적게 느껴졌다. 한입씩 먹을수록 동생과 나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만 이상한가?’라는 눈빛. 우리는 블로그 후기도 다시 찾아봤지만, 여전히 마음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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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음식을 조금 남긴 채 밖으로 나왔다.

속상했다. 특히 오늘은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해 더 예민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레스토랑에서 나와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밤의 워싱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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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여전히 쌓여 있었고, 워싱턴 기념탑은 여전히 높았다.

간접 조명 아래에서, 그 탑은 워싱턴의 중심을 조용히 밝혀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지만, 다음 여행지—보스턴으로 향할 기대를 다시 마음속에 꺼내 들었다.


계획은 계속 무너졌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계속 쌓였다.

워싱턴은 그런 도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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