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인공의 도시를 떠나 대자연으로: 그랜드 캐년이 가르쳐준 것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첫날 밤, 화려한 분수 쇼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현실적인 미션에 돌입했다. 내일 새벽부터 시작될 '1박 2일 그랜드 캐년 투어'를 위한 짐 싸기였다. 단 하루 묵었을 뿐인데 캐리어를 다시 닫는 일은 늘 번거로웠다. 우리는 투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 백팩에 챙겨 넣고, 무거운 캐리어는 호텔 라운지에 미리 맡기기로 했다. 다음 날 픽업 시간은 무려 새벽 4시. 그 이른 시간에 허둥대지 않으려면 캐리어 보관이라는 '숙원 사업'을 오늘 밤 안에 끝내야 했다. 라운지 근처의 벨맨에게 다가가 캐리어를 맡기며, 미리 준비해 둔 현금 4달러(캐리어 하나당 2달러)를 팁으로 건넸다. 벨맨은 우리의 이름과 픽업 예정일이 적힌 종이표의 반쪽을 북 찢어 건네주었다.
"이틀 뒤에 올게요." 가벼워진 손을 툭툭 털며 뒤돌아서던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내 지갑 속에 고이 접어 넣은 이 작은 종이 쪼가리가, 1박 2일 뒤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거대한 환장할 사태를 불러올 복선이었는지를. (그 눈물겨운 캐리어 상봉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겠다.)
홀가분해진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의 밤을, 우리가 묵는 플래닛 할리우드 호텔을 마저 탐험하기로 했다. 이 도시의 호텔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1층 전체가 거대한 카지노장으로 깔려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슬롯머신 기계음과 네온사인 사이를 홀린 듯 오갔다. 호텔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뽐내기 위해 1층을 베네치아의 운하, 이집트의 피라미드, 파리의 에펠탑 등 세계적인 랜드마크 콘셉트로 꾸며놓고 있었다. 우리도 투어 이후에 '호텔 투어'를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그 압도적인 규모와 끝없이 이어지는 인공의 화려함에 지쳐 결국 모든 호텔을 둘러보는 것은 포기했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내일의 투어를 위해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 4시. 도시의 불빛은 꺼질 기미가 안 보이고 우리는 쏟아지는 잠을 참아내며 픽업 밴에 올라탔다. 다행인 건 우리가 배정된 픽업 시간대가 같이 투어하는 사람들 중 마지막 순서라는 점, 불행인 건 남아있는 자리인 맨 뒷자리 세 번째 열에 앉아야 하는 점이었다.
차 안에는 신혼여행 온 신혼부부, 친구끼리 온 대학생들, 대학원 동기로 보이는 30~40대 이모님들, 그리고 홀로 여행 온 분까지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장시간 차를 타야 하는 캐년 투어의 특성상 우리에게는 엄격한 '로테이션 룰'이 주어졌다. 목적지에 내릴 때마다 첫 번째 열은 두 번째 열로, 두 번째는 세 번째로 자리를 바꾸는 식이었다. 특히 햇빛을 정면으로 받고 운전자의 졸음을 감시(?)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는 조수석 역시 모든 팀이 공평하게 거쳐 가야만 했다.
가이드님의 활기찬 인사와 함께 차는 끝없는 어둠을 뚫고 사막으로 향했다. 헤드뱅잉을 하며 깊은 잠에 빠졌다가 눈을 뜰 때마다, 창밖으로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며 붉은 암석들을 물들일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우와!" 탄성을 내뱉으며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가 다시 기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했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아침 식사를 위해 밴이 멈춰 선 곳은 사막 한가운데의 맥도날드였다. 다른 투어 차량들도 모두 이곳으로 집결하는 바람에 매장 안은 인산인해였다. 나는 재빨리 맥도날드 앱을 다운받아 주문을 넣었다. 쿠폰과 할인 혜택이 쏟아지는 신세계를 경험하며, 훗날 한국에 돌아가서도 맥도날드 앱의 충성 고객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동생과 나는 '감격의 맛'을 만났다. 동생의 추천으로 주문한 '소시지 맥그리들(McGriddles)'이었다. 짭조름한 소시지 패티를 감싸고 있는 것은 평범한 빵이 아니라, 메이플 시럽을 잔뜩 머금어 달콤하고 촉촉한 팬케이크였다. 단짠의 완벽한 조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지친 몸에 혈당이 돌자, 모든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마침내 대자연의 한복판에 섰다. 자이언(Zion) 국립공원, 브라이스(Bryce) 캐년, 파월(Powell) 호수, 그리고 호스슈 벤드(Horseshoe Bend)까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지구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억겁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울퉁불퉁한 붉은 암석 위를 걷노라면, 마치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이름 모를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것만 같았다.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우리는 인생 사진을 건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서운 바람 앞에서도 기꺼이 롱패딩을 벗어 던졌다. 대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보존해 둔 미국의 스케일이 새삼 경이로웠다. 특히 햇빛이 협곡의 틈새로 스며들어 바위의 붉은빛을 절정으로 끌어올릴 때면, 우리의 어휘력은 처참히 무너졌다.
"대박… 와, 미쳤다."
수십 번의 감탄사 외에는 이 압도적인 풍경을 설명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한낱 먼지처럼 작은 존재라는 걸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 그럼에도 그 먼지 같은 존재인 내 마음속에는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차올랐다. "행복하다. 진짜 감사하다." 동생과 나는 그 말을 주문처럼 달고 다녔다.
1일 차 투어의 마지막은 사막의 밤하늘 아래서 즐기는 별장 바베큐였다. 낯선 타국의 사막 한가운데서 각종 채소와 김치, 밥과 함께 먹는 삼겹살이라니. 가이드님이 구워주신 삼겹살은 수분이 날아가 다소 '바싹(Crispy)'해졌지만, 그마저도 훌륭한 만찬이었다.
배를 채운 뒤 밖으로 나오자, 이번엔 하늘이 우리를 압도했다. 쏟아질 듯 빽빽하게 박힌 별들을 하나둘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해 버렸다. 동생과 나란히 누운 투 베드 룸의 침대에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은 엔텔롭 캐년을 거쳐 대망의 '사우스 림(South Rim)', 즉 진짜 그랜드 캐년의 메인 코스를 마주하는 일정이었다. (솔직히 말해, 기대를 많이 했던 엔텔롭 캐년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단 조금 덜해 내심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랜드 캐년 사우스 림에 섰을 때, 앞선 모든 감정은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이 시야를 가득 메운 순간, 우리의 감탄사는 수없이 뻗어져 나왔다.
미국에서 꼭 가야 할 두 곳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뉴욕'과 '캐년 투어'를 고를 것이다. 가장 극대화된 인간의 도시와, 가장 극대화된 대자연의 민낯. 동생 역시 한 달 반의 미국 여행 중 가장 완벽했던 '원픽'으로 주저 없이 이 그랜드 캐년 투어를 꼽았다.
이틀간의 벅찬 감동을 가슴에 품고, 밴은 다시 방향을 틀어 라스베이거스 시내로 향했다. 대자연의 고요함에서 인공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환락의 도시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창밖을 보며 다가올 안락한 호텔에서의 휴식을 상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 호텔 한구석에서, 4달러의 팁과 맞바꾼 우리의 캐리어를 되찾기위해 심상치 않은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