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팁을 요구받던 오후, 우리는 다행히도 그 호텔을 떠날 수 있었다
3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남은 일정은 이제 호텔이 아니라 에어비앤비에서 보낼 예정이다.
우리가 머무르던 시기의 라스베이거스는 숙박비가 유난히 비쌌다. 이 도시는 늘 무언가가 열리는 곳이라, 월별로도 다르고 주별로도 다르고, 심지어 하루 차이로 가격이 확 뛰기도 한다. 우리가 둘째 날 캐년 투어를 1박 2일로 넣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가장 숙박비가 비싼 날을 아예 외부 일정으로 비워 두면, 그만큼 숙소비를 아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꽤 오래 에어비앤비를 찾아다녔다. 시내와 가깝고, 침대가 두 개 있고, 깔끔하면서도 가격이 납득 가능한 곳. 그렇게 겨우 찾은 곳이 1박에 20만 원대인 숙소였다. 거실은 집주인과 공유하지만, 우리가 쓰는 방은 따로 잠글 수 있어서 생각보다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는 구조였다. 집주인은 출장이 잦은 사람이어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집에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었다.
아무튼 다시, 호텔 로비에 도착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맡겨 둔 짐을 찾으려고 예전에 받아 둔 종이로 된 보관증을 꺼내려 했다. 분명 갈색 크로스백 앞주머니에 넣어뒀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가방 안을 뒤집고 옷 주머니까지 확인했지만 없었다. 이것저것 꺼냈다 넣는 사이에 어디선가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순간 머리가 서늘해졌다.
그래도 여권을 보여줘서 내 이름을 증명한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는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짐 보관소 앞에 서 있던 벨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하더니 안쪽으로 들어갔다. 맡겨진 짐이 워낙 많아서인지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후에 그는 우리 이름이 붙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보다도 안도감이 먼저 들어, 캐리어가 정말 우리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그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그때 벨맨이 말했다.
팁을 달라고.
우리는 잠깐 멈칫했다. 이미 짐을 맡기던 날 팁을 다른 분께 드렸다고 설명했다. 보통은 맡길 때 드리는 거라고 해서 그때 현금으로 드렸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는 받은 적이 없으니, 지금 짐을 찾아줬으니 다시 팁을 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우리는 현금이 없다고 했다.
정말로 없었다.
캐년 투어에서 가이드 팁으로 이미 남은 현금을 거의 다 쓴 뒤였다. 지갑 속엔 동전 몇 개뿐이었다. 나는 지갑 안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미 다른 직원에게 드렸다고 말해도, 그건 그거고 자기는 자기가 애써 찾아줬으니 팁을 받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당황스럽고, 지치고, 무엇보다 화가 났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간신히 여행 중인 우리 남매에게,
돈 아끼기위해 손가락 빨아가며 여행 중인 우리를 꽝꽝 붙잡아 세운 채,
돈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너무 밉기만 했다.
우리는 ATM에서 돈을 뽑아 오겠다고 말했다.
그 말과 함께 난관이 시작됐다. 나는 현금을 찾으러 호텔 안팎을 돌아다녔다. 어디에 ATM이 있는지 묻고, 또 묻고, 낯선 복도를 지나고, 로비를 건너고, 한참을 헤맸다.
그동안 동생은 짐 보관소 근처에 남아 있어야 했다. 벨맨이 돈 들고 올 때까지 캐리어를 들고서 못가게 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캐리어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 불안했던 건, 그때 동생 휴대전화 데이터가 잘 되지 않아서 내 핫스팟을 함께 쓰고 있어서 떨어져 있으면 서로 연락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위해 떨어졌고 그래서 연락도 끊겼다. 나는 혼자서 현금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동생은 하염없이 짐 옆에 묶여 기다리고 있고. 나는 얼른 돈을 찾아 동생한테 가기위해 열심히 돌아다녔다.
한참 만에 겨우 ATM을 찾았는데, 막상 인출 화면을 보니 수수료가 너무 비쌌다.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체감상 5만원이 넘는 돈을 그냥 수수료로 내야 하는 수준이었다. 호텔 안 인출기라 더 비쌌던 것 같다. 그 앞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동생에게 돌아갔다. 일단 같이 이야기를 하고 결정하기로 했다.
30분은 족히 지났을까.
처음 동생을 두고 온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또 당황했다.
어디로 간 거지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동생은 짐 보관소가 아닌 호텔 안쪽 로비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동생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누나, 그 벨맨이 돈 안 줘도 된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차 동생에게 물어봤다.
"어?"
30분 넘게 나는 현금을 찾겠다고 낯선 호텔을 헤매고, 동생은 캐리어와 함께 그 자리에 붙들려 있던 상황. 아까는 돈 달라고 계속 우리를 보챘었다.
동생이 30분 넘게 캐리어와 함께 짐보관소 앞에서 멀뚱히 있는 모습을 보고
그도 우리가 정말 돈을 안 주려는 게 아니라, 줄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헤매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아니면 이렇게까지 곤란해하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다행히 그 호텔을 떠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버스를 타고, 라스베이거스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 숙소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당연히 호텔만큼 편리하진 않았지만, 시끄러운 관광지 한복판을 벗어나 있으니 오히려 숨 돌릴 틈이 생기는 느낌도 있었다. 가는 길에는 스피어도 지나가며 봤다. 멀리서 봐도 묘하게 비현실적인 모양이라, 정말 라스베이거스다운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다이얼처럼 생긴 현관 장치에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다이얼 방식이라 조금 낯설었다. 우리는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쏟아졌다.
생각해보면 그날은 라스베이거스다운 화려함보다, 여행이 가진 피곤함과 현실감이 더 짙게 남은 날이었다.
숙소를 옮기는 일, 종이 한 장을 잃어버린 일, 예상치 못한 요구 앞에서 당황하던 순간들. 여행은 늘 반짝이는 장면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날 다시 알았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그 호텔을 나왔고, 다음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고, 하루를 끝냈다.
여행 중에는 이런 식으로 예상 밖의 일들이 생기고, 그걸 어떻게든 지나쳐 다음 장소로 넘어가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한 도시를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라스베이거스의 그 오후도 그랬다.
조금 지쳤고, 꽤 당황했고, 솔직히 많이 짜증났지만, 결국 우리는 또 다음 숙소로 이동해 잠들었다.
행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까지 끌어안은 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