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무튼 시리즈 따라쓰기 <아무튼 도라에몽>

by 채은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배우 김다미와 신예은이 주연을 맡은 <백번의 추억>. 버스안내양이 존재하던 1980년대의 이야기다. 동글동글한 김다미 배우와 시원한 이목구비의 신예은 배우의 풋내나는 케미가 꽤 재밌다. 사실 우리 엄마 젊을 적 이야기라기에 함께 보려고 아껴뒀다가, 친정집에서 내리 두 편을 정주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시간여행하듯 장면 하나가 나올 때마다 옆에서 통역가처럼 설명을 해주었다.


“저 때는 저렇게 회수권을 사서 탔어. 몰래 그려서 타는 사람을 안내양이 잡아내는 거야.”


“안내양들은 거의 고등학생부터 20대까지 있었지. 저기서 김다미가 나보다 두세 살은 많겠다.”


드라마를 보는데 한 장면이 내 눈길을 끌었다. 만원버스가 출발하려는데, 한 여고생이 뛰어온다. 그러곤 버스안내양에게 사정사정한다. “언니, 제발요. 저 이거 못 타면 진짜 죽어요.” 버스안내양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학생을 억지로 낑겨 넣어 태워준다. 엄마는 그 대목에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번 더 입을 열었다.


“저땐 버스에서 머리삔이 헝클어지고 옷이 구겨져도 그러려니 넘어가던 시절이었어.”


성인이 되고 <도라에몽> 만화책을 다시 읽었을 때, 내 안에 생긴 묘한 기시감은 꼭 버스안내양이 수거한 가짜 회수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어딘가 촌스러웠다는 의미다.


“안뇽! 한 달 전의 우리 이제 왔어.”


“역 앞에서 영화 촬영하는 거 보고 왔걸랑. 한중 합작의 초대작이라 스타들도 드글드글. 장국영이랑 정우성이랑. 기타 등등.”


당시 젊은이들 사이 자주 쓰였던 ‘안뇽’이라든가, ‘왔걸랑’ 같은 구어체 말투. 게다가 시대의 배우였던 장국영, 정우성도 소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신세대 유행어에 신경깨나 쓰는 편집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 공들인 유머의 흐름이 뚝 끊기는 부분도 있었는데 때 아니게 국어 교과서 말투가 나오는 지점이었다.


예를 들어 도라에몽과 진구가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무지 재밌었다.’ ‘너가 그렇게 말했다.’ 로봇같은 대사를 던지는 부분. 초등학생 아이들끼리의 대화에는 안 어울릴 법한 ‘엥’스러운 문어체가 45권 내내 반복되었다. 이건 ‘서울 사투리’ 같은 시대의 방언일까? 아니면, 편집자들이 일을 대충 했나? 아무리 90년대라도 그렇지. 45권이나 되는 출판 편집을 여러 권 해본 이들이, 풋내기 편집자에게도 보이는 실수를 하다니. 그 출처는 어디일까 궁금해져 도라에몽 만화책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도라에몽이 1969년 일본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는 텔레비전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진출했지만,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온 건 1990년대나 되어서였다. 사실 최초로 한국 만화시장에 등장한 건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였는데 당시는 일본 대중문화가 국내에 개방되기 전이라 공식 유통은 막혀있었다. 도라에몽 역시 정식 판권 계약 없이 여러 레이블에서 유통되었고 ‘도라에몽’이 아니라 ‘동짜몽’이라는 이름으로 만화방이나 문고판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러다 대원동화(현 대원씨아이)를 통해 정식 단행본으로 발행된 것이 1995년, 내가 태어나기 일 년 전이었다.


당시 아동 만화는 곧 교육 매체라는 인식이 강했다. 재미보다는 검열이 더 우선이었다. 그래서 폭력적인 장면이나 거친 농담은 모조리 잘려 나갔다. 비어 있는 칸은 교과서 문장을 옮겨놓은 듯한 설명체로 채워졌다. 아이들끼리 떠드는 대화 속에 느닷없이 “세균이 번식해서 땀이 되고, 땀이 공기 중으로 섞인다” 같은 문장이 끼어든 건 그 때문이었다. 그 어색한 대사들은 당시 검열의 그림자이자, 동시에 편집자들이 나름대로 ‘아동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의무감의 결과물이었다.


거기에 빠듯한 제작 환경도 한 몫했을 거다. 지금처럼 번역과 교정교열을 인터넷이 대신해주던 시대가 아니었다. 90년대 초반까지 편집자들은 펜뚜껑을 입에 물고 직접 교정 부호를 넣어가며 빨간줄을 그으며 교정을 봤다. 번역가들이라고 다를까. 당시 번역가들은 일본어 구어체를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바꾸는 감각적 훈련이 지금보다는 다소 부족했다. 원고지에 연필로 번역문을 써서 편집자에게 넘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금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렸을 것이고, 그만큼 압박감도 심했을 듯하다.


물론 90년대 중후반에는 PC가 보급되면서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인쇄소 코앞에서 서두르는 사람 눈과 손이 얼마나 정교하랴. 촉박한 마감에 쫓겨 원고를 넘기느라 편집자의 눈은 점점 흐려지고, 번역가는 원문을 자기 말로 고치다가도 결국은 대중 앞에 내놓는 책이라는 생각에 나름의 정중함을 지키려 애썼을 테다. 이를테면 「だよ!(~야!, 진짜야! 같은 표현)」 혹은 「するんだ (~하는 거야!, ~할 거라고! 같은 표현)」 같은 단어. 아무리 자연스럽게 고쳐보려 해도, 딱딱한 검열 안에선 어려웠을 거다. 번역가와 편집자는 어떤 것이 유익할지 고민하던 끝에 결국 정직하게 ‘한다’, ‘이다’같은 표현을 택했겠지. 그러곤 신세대 유행어도 욱여넣었을 거다. 그래서 한 컷 안에 교과서 같은 딱딱함과 억지 유행어가 뒤섞였다. 지금 보면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그 서툰 흔적 속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해 고민하던 따뜻함이 엿보이는 것도 같다.


한번은 일본어를 오래 공부한 친언니에게 농담처럼 통번역 일을 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야, 요즘엔 그런 거 다 AI가 해.”


아, 그렇구나. 사람의 역할이 이제는 실로 줄어들고, 출판 현장에서도 초벌 번역이나 교정 단계에서는 인공지능 번역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속도로나 정확도로나 인간이 덤빌 수가 없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삶에는 「だよ!」 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고민하는 진중함이 5분이라도 있을까? 이제 얼마나 이런 고민을 할 일이 생길까? 바야흐로 타자 몇 자만 치면 10초만에 완벽한 번역본이 완성되는, 파파고와 AI가 모든 것을 해주는 시대일 것인데. 밤새 고민할 필요가 없는만큼,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람의 흔적도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다.


이상하다. 그럴수록 나는 흐트러진 것들에 더 눈길이 간다. 도라에몽 만화책 속 미처 보지 못한 오탈자에. 투박한 번역체 대사들에. 머리로 몇 번이나 회로를 돌려가며 손으로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일들에. 실금이라도 그어져 있으면 반품해야 하는 고딕체 판넬이 아니라, 매직 죽죽 그어가며 몇 번이고 인상된 가격으로 고친 김밥집 메뉴판 같은 것들에. 그건 버스안내양과 회수권 이야길 하며 그땐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엄마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언젠가 밤늦게 공황 발작이 온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도로에 멍하니 앉아있던 친구를 데려오자, 그는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친구를 끌어안고 다독이며 같이 숨을 고르고, 굳어버린 손을 주물러주는 동안 나는 내가 인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밤늦게 AI가 아닌 나를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AI는 공황 발작을 겪는 환자에게 다양한 대처법을 알려주거나 차분하게 조언을 건넬 수는 있지만,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의 곁에서 온기를 나누어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번역이나 교정과 마찬가지다. 기계는 더 빠르고 정확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사람만이 줄 수 있다.


그날 품에 안긴 친구를 보며 문득 도라에몽 품에 안겨 우는 진구가 떠올랐다. 늘 시험에 실패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진구는 결국 도라에몽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도라에몽은 2112년의 미래에서 온 로봇이다. 인공지능이 나오고도 남을 시대일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진구의 감정을 도구로 소거시키거나 무마하지 않았다. 언제나 등을 도닥이고, 같이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걸어가줬다. 생각해보면 만화책 속 어색한 대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파파고의 글자들처럼 매끈하지는 않았지만, 번역가와 편집자의 손끝에서 나온 그 문장들은 기계가 찍어낸 언어가 아니라 누군가의 숨결이 배어 있는 말들이었다. 완벽한 기계가 아니라 그 스스로 진구 곁을 지켜주던 도라에몽처럼, 역시 사람 냄새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편리해진 요즘. 끝까지 사람이려면 무엇을 남겨야 할까. 무엇을 잃지 않으려 애써야 할까. 정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도라에몽의 촌스러운 대사와 버스 안내양의 손길에서 그 답의 조각을 본다. 인공지능의 승리라지만 여전히 AI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눈물을 닦아주고, 숨을 골라주고, 그 옆에서 함께 쉬어주는 일. 용량이 가득 차서 작은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 데이터 세상에서 지각한 여학생을 어떻게든 끌어다 태워주는 일.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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