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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Jun 26. 2023

자신만의 정의로운 분노

부끄러움의 실종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시대에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한 편의 기사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표출된 댓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사실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커다란 진실까지는 미처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선, 악을 나누는데 주저함이 없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극심한 갈등과 분열에 계획적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우리'라는 내 편과 '그들'이라는 다른 편을 구분한다고 한다. 어쩌면 편 가르기는 우리의 생존본능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편이 어느 쪽인지 알아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속한 내 편의 올바름, 정의를 뒷받침할 '편향된' 사실을 찾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자신의 편견을 굳건히 하는 사실에 집착할수록 한쪽으로 몰린 분노는 다른 편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의감을 증명하려 한다.


성장은 점점 힘들어지고 경쟁만이 극심해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그 원인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와 이익이 다른 누군가로 인해  침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분노하게 된다. (물론, 나도 내 권리와 이익이 침해받는 다면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는 그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왜 상대편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바쁘고 힘든 사회에서 거기까지 생각할 기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로만 판단해 다른 편, 다른 사람을 쉽게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진짜 원인이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진실 같은 것은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공정성뿐이다. 자신의 분노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진실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화의 최대 원인은, '나는 잘못한 게 없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가 화를 내게 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무지와 오만함 때문이다."

            - 세네카



모두가 자신의 분노에는 자신만의 정당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곧 정의이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길이라 믿는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이 보는 하늘만을 전부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라는 작은 울타리 밖에 소외되는 다수의 사람들은 우리의 정의에 포함되지 못함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그들과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공정하지 못하다는 무지하고 오만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사회에서 선과 악, 같음과 다름, 올바름과 그릇됨을 명확히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 편향된 사고로 자신만의 정의를 마구 휘두르는 - 자신이 보는 하늘만이 자신의 정의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정의란 단순하다. 그렇게 자신만의 정의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자신만의 알고리즘 안에 빠져 다른 생각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술은 점점 발전해 나가는데 사람은 기술이 만들어 놓은 세상 안에 갇혀서 자신의 세상을 점점 작게 만들어 간다. 공감력은 떨어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만한 넓은 포용력과 이해력은 그렇게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지역, 정치, 세대, 인종, 젠더, 빈부, 종교 등 에서 오는 여러 편견이 있는 사회 속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고 살 수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만나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포용력이 떨어지는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겉으로 드러난 사실 말고도 이면에 진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 어느 쪽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결국 내 세상에서, 나만의 알고리즘에서 빠져나와 더 넓은 세상, 다른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는 우물이 좁다는 것을 깨달은 개구리뿐이다. 자신만의 정의에서 빠져나와 그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하며 천박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미래는 이렇게 우리 안에 깨달음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질문은 더 밝은 미래가 언제나 정말 그토록 멀리만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정반대로 그 미래는 이미 여기에 오래전에 와 있었는데, 우리가 나약한 채 눈뜨지 못하고 있어서 우리 주변과 우리의 안에 있는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미래로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츨라프 하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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