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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Jul 24. 2023

품위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늘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근래 뉴스를 보지 않고 생활한 지가 꽤 되었다. 너무나 자극적이고 무섭고 절망적인 기사들이 앞으로 이 세상이 더 나빠져 가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 의식적으로 피했다. 어쩌면 그런 사건사고들이 나하고는 먼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애써 외면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기사보다 사람들의 댓글에 나타난 무례함과 폭력성, 이기심, 비열함과 차별, 혐오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에 상처받고 싶지 않은 탓도 크다.


자신이 괴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괴물과 같은 행동들을 하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까지 온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보통은 자신 정도면 성인까지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며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의 얼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금의 불편함이나 손해를 감수하려는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이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괴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만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이익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방향이 아닌 많은 사람들과 사회 안에 개인을 규제하는 다른 것들(예의, 규칙, 법규, 불문율 등)과 계속해서 부딪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익이 충돌하는 갈등 상황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내 이익에 반하는 것은 모두 처단해야 할 악으로 볼 것인가? 내 삶에서 내 이익 우보다 선할 더 큰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사람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바는 다를지언정 적어도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듯이 때로는 자신의 이익에 앞서 다른 사람(다른 생물)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품위인 것이다. 품위란 것이 돈이 많아야 한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는 품위 있는 삶의 시작이자 핵심이 되는 것은 '타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타인이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사람이 모든 순간마다 품위 있을 순 없다. 물론 그렇게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더 많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순간들을 마주했을 때라 할 지리도 자신이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괴물로 변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경계하며 반성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엄을 잃게 되는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최소한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여러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이익의 충돌을 이익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다.


먹고사니즘이 우선인 세상에서 이것은 모든 문제의 방패막이되곤 한다. 물론 이것은 사는데 중요한 문제인 것이 맞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하는 이유가 된다면? 나만, 우리 집단만의 이익이 우선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면? 나는 괴물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나의 이익만, 내가 속한 집단만 우선시하는 천박함은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엄성 역시 존중받을 가치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임을 모른다. 


세상에서 돈 있는 사람이 더 존중받아야 하는가? 권력이 있는 사람이 더 존중받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렇다고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더 존중받아야 하는 것인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지, 누가 옳은지 명확히 보이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이해는 상충되고 입장은 차이가 있으며 저마다 도덕적 기준의 높이는 다르다. 


추운 겨울 길에서 지내는 동물들을 돌봐줘야 하는가?

우리 집 앞에 장애인 학교, 시설이 생긴다고 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멀쩡해 보이는 거지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의견의 차를 좁히는 노력을 굳이 하여야 하는가?

다른 아이들에 대한 훈육과 관심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평소 나에게 불친절했던 동료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줘야 하는가?

우리 마을의 경제적 발전이 중요한가? 다음 세대에 남겨줄 환경 보호가 중요한가?

학력이나 경제력등이 낮은 사람에게 공정함과 공평함의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정당한 권리를 위해 데모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의 출퇴근이 불편해진다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가?

무식하고 무례한 사람에게 조차 품위를 잃지 않고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의 작은 이익이 다른 사람의 큰 손해라면 과연 양보할 수 있는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들이다. 과연 저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각자의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내 입장은 무조건 적대시하지는 말자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의견이 무엇인지 정도는 시간을 내어 알아볼 노력 정도는 하려고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품위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인간을 나보다 못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죽고 싶다. 이왕이면 품위 있는 인간으로서.


나 아닌 다른 사람, 어쩌면 내가 적대시하고 있는 그 사람도 자신만의 소중한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와 같은  한 인간일 뿐이라는 연민을 잃어버리지 않고 싶다.



도덕 / 에리히 케스트너


선이란 있지 아니하다,

예외 : 사람이 선을 행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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