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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Sep 15. 2023

계속 비가 올 때

빨래가 안 말라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 계속 비가 내리고 있어요. 일주일쯤 비가 내리고 하루 해가 뜨고 구름 낀 날들이 며칠 지나고 다시 비가 일주일쯤 내리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빨래도 잘 안 마르고 눅눅해서 그런지 살짝 건조기에 눈이 가기도 하네요. 


미니멀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전자제품과 가구들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었어요. 더 많은 물건들로 생활하는 공간이 침범당하는 것에 어느 날 못 견디겠는 느낌에 그렇게 결정했어요. 몇 년 동안은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려고 노력해 왔고 또 뭔가를 사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해 왔어요. 그래서 안 마르는 빨래를 안타깝게 쳐다보면서도 건조기를 막상 사기는 망설여지네요.


그리고 전 해를 너무나 좋아해요. 햇살 아래 바짝 마르는 빨래를 좋아해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햇빛 때문이기도 하고요. 물론 여름에 햇빛을 피해 다니기도 하고 더워서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원한 그늘이 있는 것은 햇빛 때문이죠. 너무나 좋아하는 바닷가도 구름 낀 날보다 해가 쨍쨍한 날이 더 기분이 좋기도 해요. 


그런데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거나 구름 낀 날들이 길어지면 전 너무나 우울해져요. 잠도 잘 잘 수가 없어요. 어렸을 때는 해가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어요. 이런 기분이나 신체적 문제에 있어서 햇빛이 어떤 작용을 한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이렇게 비가 계속 내리고 구름 낀 날은 좀 힘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해지고 한줄기 희망조차 삶의 어디서도 찾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괴로워져요.


침대에 누워서 생각해 봐요. 비가 내리고 눅눅한 공기가 내리누르는 이 공간 위로, 저 높은 곳에 있는 구름 위로 비추고 있을 햇빛을 상상해요. 예전에 비행기를 탔을 때 비 오던 공항의 구름을 뚫고 올라 봤던 무지개와 너무나 파랬던 하늘과 눈부신 햇살을 기억해요. 그때의 나는 너무나 어렸고 햇빛이 마냥 좋기만 했어요. 인생이 그래도 괜찮았을 때였어요. 적어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혼자 힘으로 갈 수 있었던 때이니까.


뭔가 잘못되어서 지금 이 침대에 누워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그냥 인생에 그런 때인 거예요.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날아왔지만 자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장소에 떨어진 느낌인 거예요. 그리고 그 낯선 장소에서 또 열심히 비슷한 장소를 찾아 헤매고 있지요. 그래도 언젠가 제가 상상했던 아름답고 눈부신 해변가에 누워있을 수 있겠죠? 아직도 희망을 버리진 않았어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기에 걸린 병도, 여전히 희망이 없어 보이는 앞날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날이 있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며 누구나 그렇듯이 하루를 잘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늘 햇빛이 반짝이는 해변에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자신을 상상해요.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하네요. 어쩌면 내일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다음 날은 분명 해가 뜰 거예요. 그럼 열심히 빨래를 돌려야겠어요. 가을에 바람이 불면서 해가 쨍쨍 비추면 빨래는 바짝 마를 거고 이 눅눅한 공기는 금방 사라질 거예요. 제 마음도 햇빛에 바짝 말릴 수 있겠지요. 해가 있는 동안 열심히 할 일들을 해 나갈 거예요. 


또다시 비는 올 거고 어쩌면 더 힘든, 잠 못 자는 날들이 이어질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 비가 오는 시기는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다시 해가 오랫동안 비추는 날들이 시작될 거예요. 그때는 또 비가 와서 침대에 누워 쉴 날을 기다릴지도 모르겠지요. 아마도 그때까지 건조기는 안 살 것 같아요. 어차피 해가 뜨면 저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 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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