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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Oct 10. 2023

장애와 비장애중심 세상

사회적 약자와 더 사회적 약자의 슬픔

어릴 적에 나의 동네에는 장애인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와 반대에 있었다. 등교 시간이 되면 나는 초등학교로 향했고 그 학교로 가는 학생들은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등교했다. 가끔 보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특별한 거부감은 없었다. 어른들은 그들을 보고 수군거렸지만 어린 나와 동네 친구들에게는 그저 우리 친구들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인 그저 남과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6학년 때 우리 반에는 병으로 인해 신체가 몹시 불편한 친구가 있었다. 걸음도 불편하고 몸에 반이 뒤틀려있어 그 친구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친구가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나 역시 그 친구와 자리가 멀어서 그랬는지 별로 친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집에 같이 가거나 가끔 대화를 하거나 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반 친구였고 우리 반 모두 그 친구를 특별히 여기진 않았다.


그래도 초등학교까지는 1년에 몇 번은 주변에 있는 특수학교에 있는 같은 학년 친구들이 장애에 대한 이해와 통합교육이라는 정책으로 그들과 같이 수업받을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나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때 장애가 있던 친구들과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 있었고 그것에 대해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었다. 그냥 우리는 다 같은, 친하거나 친하지 않은 같은 반 친구였을 따름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중학교 이후부터 내 삶에 장애인은 볼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그들은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듯했다. 나도 그들을 잊었다. 성인이 된 나는 힘들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만 힘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힘든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하루하루 세상과 싸우느라 지쳤다. 나는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보고 누군가를 더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그럴 여력이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왜(더 잘 사는 사람들을 놔두고) 나에게 그런 것을 바라느냐 화를 냈을 수도 있겠다.


세상이 사회적 약자도 충분히 잘 살 수 있게 좀 더 나아져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져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너무도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주장은 힘을 내지 못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은 그들의 일상에 불편을 끼치는 존재로 그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 시민으로 끼지 못한다. 같은 나라에 태어났음에도,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그들은 비장애인들에게 있어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이 될 수가 없다. 동료가 아니다. 외계인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능력주의가 사회 분위기인 상황에서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에 비해 능력이 모자란다고 판단받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부담이 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선량한) 또한 세상에서 힘든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누군가를 배려해 줄 힘이 없다고 그들 자신 역시 불공평한 세상의 피해자라고 언젠가의 나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장애인들이란 비장애인의 눈에는 자신의 이익을 아무 노력 없이 받아만 가는, 사회에 어떤 이익도 환원할 수 없어 보이는 존재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사회적 약자가 더욱 약한 자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금이 장애인들에게 쓰이는 것들에 대해 억울해한다. 사실상 세금이 장애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쓰이는 것보다 권력자들이나 그들에게 기생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낭비되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힘 있는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것보다는 힘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쉽다. 


사회적 약자는 사회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와 그렇게 대립한다. 사실 서로 연대해서 더 큰 부조리에 대항해야 하는 그들임에도 서로의 아픔을 보지 않고 투쟁을 이어간다. 이 투쟁에 있어 누구도 진정한 승자는 될 수 없다. 그들이 서로 적대시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가장 약자의 기준에 맞춰진다면 당연히 다른 약자들의 삶 역시 나아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로의 삶을 들여다 보고 서로의 불행 베틀에서 벗어나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리고 험난한 이 세상에 태어난 서로의 존재에 대해 연민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약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상대편의 권리가 결코 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오히려 상대의 권리를 존중해 주는 것이 나의 권리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것임을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차별은 공기와 같아 기득권에게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지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차별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상처받고 다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인 동시에 그 약함을 응시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간의 존엄은 독립 in-dependent보다도 상호의존 inter-dependent을 통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실은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힘이라는 사실을 그 대화에서 배웠다. 당신도 그 대화에 함께 했으면 한다." 

 - 김승섭 서울대 부교수



내가 어릴 적 장애에 어떤 편견도 없었던(아마도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시절 장애를 그저 불편한 몸과 정신을 가진, 내가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그냥 우리 반 친구로만 여겼던 마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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