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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Oct 20. 2023

우리 사회에서 장애란?

우린 모두 같은 존엄을 가진 인간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면 부모는 이 새로운 생명의 등장에 대해 큰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다. 아이의 손짓, 눈 맞춤, 발버둥 치는 것까지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이가 웃어도, 울어도 사랑스럽고, 맘마 먹을 때도 예쁘며 잘 때는 정말 천사 같다. 대부분의 이 시기에 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건강하게만 커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뿐이다. 


그러다 아이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간절했던 부모의 첫 소망도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을 뿐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 보다 조금 늦은 발달을 보이게 되면 부모에게 불안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른바 정상발달범위의 오차범위 안에서 발달 과정을 거쳐 성장한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발달이 지연되지 않는 이상 건강한 아이들은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게만 태어나고 건강한 환경에서 안전하게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원인(그것을 알 수 있든지, 모르든지)으로 인해 정해진 정상발달범위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나라에서 정한 기간 동안 평균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의학적으로 장애 판정을 받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장애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장애란 신체, 인지, 지적 능력, 정신, 감각, 발달의 영역 또는 두 가지 이상의 영역에서 하나 또는 두 가지 손상이 생겨 평범한 일상생활에 참여하는 데 있어 개인의 능력에 심각한 제한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2022/장애자녀부모지원종합시스템/온 맘)” 


‘장애’라는 두 글자가 눈 보다 마음에 와 박힌다면 그것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이전에 장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바로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게 나쁜 사람이 아니더라도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개인주의이며 그저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자신 같은 사람들에게 다른 누군가를, 그것이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배려하고 이해해 줄 그런 마음의 여유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럴진대 보통이 아닌 사람들은 장애에 대해 어떻게 대할지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도 한다. 아직 사회에서 보는 장애 인식이란 것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을 지금 당장 할 일도 많은데 굳이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면서 고통과 시련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고통과 시련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누구도 고통스럽고 힘든 삶은 원하지 않는다. 그 삶을 자기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길 원하지 않는다. 장애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혹은 가족들이 장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질 희망이 전혀 없는 어떤 손상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본인이 아니면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마음과 인생일 것이다. 


그런 장애인들에게 자신들과 다르다고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 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원래 다르다는 것을 잊고) 혐오를 내비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 행동과 마음이 자신을 얼마나 품위 없고 천박한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장애인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가능한 행동인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장애인들 앞에서 무엇인지도 모를 우월감을 뽐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대인가, 어느 곳에서는 한 때 장애를 귀신 들린 것으로 보기도 했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영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접근하여 장애인들을 단죄했다.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이런 인식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도 남아있다. 어느 대학 교수란 할아버지가 나에게 내 아이가 아픈 것에 대한 원인으로 부모나 조상의 죄와 잘못 때문이란 말을 했다.


또한 의학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마치 나의 아이가 자신의 자녀에게 무언가를 전염시키는 듯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아이 어머니의 요청도 받았던 적이 있다. 뭔가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길이 얼마나 불쾌하고 슬픈 것인지, 아니 그 눈길은 마치 바늘처럼 나와 내 아이를 마구 찌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자면 장애인이 된다는 말은 당신 혼자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억압과 차별의 역사가 당신이(우리가) 사는 세계에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김원영 변호사>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성취나 성장 따위는 고사하고 오로지 본인의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사과를 해야만 하는 장애인의 삶은 그저 이해받지 못해 홀로 존재해야만 하는 외롭다는 감정 차원(물론 외로움도 힘든 것이다.)의 삶이 아닌 것이다.


현재 사회는 개인이 지닌 장애를 의료적으로 접근하여 치료하거나 교정을 통해 보다 그들(비장애인)과 가깝게 ‘정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사회적 자원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회적 자원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또한 높이고 있기도 하다. 늘 사회적 자원은 부족하다. 그것은 장애인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사회의 대부분 구성원들에게 역시 사회적 자원은 부족하다. 


그래서 항상 우선순위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깊은 철학적 사고와 충분한 토의, 구성원들의 이해, 동의가 필요하다. 무엇에 먼저 어떤 것을 투입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논의는 논의로 끝난 경우가 더 많다. 


사실, 교육과 치료만으로는 비장애인과 비슷하게 ‘정상’으로 인식될 만큼의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장애가 아닌 것이다. 물론 조기 치료와 교육은 장애아들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다. 그러나 어쩌면 치료와 교육만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에서 장애인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시스템일 것이다. 적어도 몸과 정신이 비장애인들이 인정할 만큼 '정상'적이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장애인으로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으면 한다는 것이 과연 장애인들만의 특권을 말하는 것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시간과 비용에 대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동의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사람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늘 우리의 삶을 비용으로 곧잘 치환해 왔다. 그런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은 많은 비용이 드는,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골칫거리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장애인은 늘 집에나 있으라는 말을 듣거나 특수학교나 다니 라거나, 거리를 다니거나 이동하는 것조차 그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싫어한다. 도무지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대체 얼마큼의 시간이 지나야 같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사는 것이 가능해 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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