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되었을 때
철학자 누스바움은 두려움이 증오, 혐오, 분노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음을 일찍이 지적했다. 현재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봐도 그렇고 바로 내 주변만 봐도 위의 지적에 동감 가는 부분이 많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정의에 빠져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현재가, 미래가 두렵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그렇게 사람들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계속 주장되고 있는 정해져 있는 자원 부족 문제 때문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들을 더, 더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은 때로 미래를 준비하게 해 주고 위험을 피해 갈 수도 있게 해 준다. 두려움 역시 사람에게는 필요한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친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강력하고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찾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그가 지금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해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다. 특히 취약 계층들, 정보와 교육, 지식, 경제적 능력 등 모든 것에서 취약한 계층들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사람들은 과거 사회가 이제까지 보다 좋았던 사회였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사실 사회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었든 간에 늘 직면해 왔었다. 우리가 잊었을 뿐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회와 구성원들은 두려움에 갇혀 그 감정이 우리를 어디로 몰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시각을 잃어버린다. 두려움은 본능적인 감정이다. 그것을 잘 조절하고 절제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분노와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다. 공감이라는 감정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세계의 밖에 그 무엇과 연결되는 감정이다. 공감이라는 감정과 연결되는 세계는 다른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연결된 세계는 오직 나와 나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세상뿐인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감정이다. 어쩌면 지독한 자기애적인 나르시시스트에서 볼 수 있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당연해 보이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만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혐오한다. 사회는 점점 서로를 혐오하는 것을 동력으로 삼아 굴러가고 있는 듯하다.
삶은 원래 힘들고 어렵고 두렵다. 오늘날 팽배한 분노와 증오, 혐오로 일어난 일들, 전쟁을 보면 진짜 두려움과 슬픔이 느껴진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어디까지 증오를 표출하는지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원통한 일을 당했기에 보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싶지도 않다. 이제까지 설움 받아왔던 역사로 인해 이제는 뭔가 보상받아야만 평등해진다고 하는 생각과도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받았던 부당함에는 같이 분노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의 증오와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평등하지만 각자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서로의 다른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공감도 그러하지만 연민의 감정이 먼저 들고 나서 공감이 가능하다. 우리가 세상을 미워해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셀 수도 없이 많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늘 말씀하시는 몇 날 몇 밤을 새워도 모자랄 기막힌 일들이 인생을 채우고 있을지도 모르고 현재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 아픔이 타인도 겪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는 타인이 아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수도 있다. 혐오하지도, 증오할 필요도 없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 해도 세상은 두렵다. 자신이 처한 현실도 위태롭다. 그리고 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세상에 자신의 억울함을 풀길은 요원해 보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눈에는 눈 전략은 온 세상을 장님으로 만들 뿐이다."
- 간디